9월의 전쟁영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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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김은정 | 등록일 | 12.08.30 | 조회수 | 17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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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영웅 손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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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의 전쟁영웅 손원일
해군 중장
우리나라의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이 1945년 11월 11일에 창설됐다는 것을 아시나요? 특히 11월 11일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요, 十一 월 十一일, 즉 선비사(士)자가 두개가 겹쳐지는 날이기 때문에 '해군은 신사도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손원일 해군 준장의 신념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군의 창설에 큰 힘을 쏟고 초대 참모총장을 역임했던 해군 군번 1번 (80001) 의 소유자이자 수 많은 훈장의 주인공인 손원일 해군 중장, 2012년 9월의 전쟁영웅인 손원일 해군 중장의 업적을 오늘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9월의 전쟁영웅인 손원일 해군 중장은 1909년 5월 5일(음력)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목사 손정도 의 2남 3녀중 장남으로 출생했습니다. 1915년 중국 광성소학교 , 1919년 길림문관중학교를 거쳐 1924년에 중국 남경 중앙대학 농학원 항해과를 졸업했습니다.
졸업한 이후에는 중국 해운공사에서 근무를 하다가 1927년 중국해군의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3년간 독일에서 수학했습니다. 1930년 아버지인 손정도 목사의 사망으로 잠시 귀국하였으나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탓에 상해독립단체의 비밀연락원이라는 누명을 씌고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강서에서 옥고를 치르고 일년 후인 1931년에 출감했습니다.
출감한 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게 된 손원일 해군 중장은 해운업에 종사하다가 1945년 광복 이후 한국으로 귀국하였습니다. '우리의 바다는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조국의 바다를 지키기 위한 해군을 건설할 뜻을 품고 동지를 규합한 끝에 1945년 8월 21일 동지들과 해사대의 결의를 조직하고 8월 23일에 해사대 임시사무소를 설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뒤 미군정이 실시되자 미군정과의 협의를 거쳐 드디어 1945년 11월 11일 현재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을 창설했습니다.
손원일 해군 중앙은 해방병당의 초대 단장에 취임하였고 이후 1946년 2월 장교에 대한 계급이 부여됨에 따라 참령으로 임명되었습니다. 6월, 해방병단이 해안경비대로 개칭되자 해안경비대 총사령관 겸 병학교장으로 부임했습니다. 1948년 8월 정부가 수립되어 해안경비대는 해군으로 편입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됩니다.
1948년 10월 여.순 10.19사건이 발생하자 군대를 이끌고 진압작전에 참가하여 해안봉쇄와 함포사격으로 혁혁한 전과를 거두어내기도 했습니다.
해군 창설 초기, 손원일 해군 중장은 장비의 빈약함을 절감하고 전투함을 우선적으로 보유하기 위해 함정건립기금거출위원회를 구성하여 성금과 정부보조금으로 4척의 PC함을 구입하고 실전 배치하는 등 해군발전에 기여했습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손원일 해군 중장은 유엔 해군과 함께 제해권을 확보하고 해상경비를 강화하여 적의 해상침투를 거부하고 비상조치를 취하며 해상에서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개전 초기의 육계해전과 대한해협전투의 승리는 물론,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서 작전계획과 수행에 참여하여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도왔고, 이후 도솔산 지구 전투, 동,서해안 철수작전, 동서남해 해상봉쇄작전 및 소해 작전 등의 해상과 육상의 주요작전을 성공시키는 등 눈부신 활약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해군의 아버지'라는 별칭을 얻었고 전쟁이 끝난 1953년 6월에는 해군중장으로 예편되었습니다. 그해 8월에는 제 5대 국방부장관으로 취임하여 능숙한 외교수단으로 군원을 획득하여 국방력을 증가시키고 국군묘지 창설, 군목제도의 활성화, 전시연합대학과 국방대학원 창설, 국내 외 위탁교육제도를 신설했습니다.
1956년에는 서독대사로 임명되어 3년간 외교활동을 벌였고 이후 재향군인회 고문, 성우구락부, 서해구락부, 국토통일원 고문, 홍보협회장 , 반공연맹고문, 국제문화협회 상임고문, 대한석탄공사 이사장 등의 요직을 경임하고 1980년 2월 15일 72세로 일생을 마치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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