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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봉화산이름 광중 1229 안한길
작성자 진천중 등록일 10.11.09 조회수 38
  옛날 통신시설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는 높은 산 위에 횃불을 들어서 외란이나 내란 등을 조정이나 일반백성들에게 알렸다. 진천의 봉수지는 진천읍에서 청주로 가는 곳인 진천읍 사석리 및 원덕리에 봉화산(烽火山)이 있다. 거기에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다. 남쪽은 청주 거질대산(淸州巨叱大山) 북쪽은 충주 망이산(忠州望夷山) 봉수대를 바라보고 있다. 진천의 봉수지는 청주에서 오는 봉화를 받아서 충주 망이산으로 보내는 중간 역할을 했던 곳이다. 그러나 봉수대가 문명의 이기(利器)에 밀려서 자취를 감춘지 벌써 100여년이 된다. 봉화산을 봉수대가 있기 전에는 소을산(所乙山 所仁山 蔬乙山 所月山)이라고 하였다. 봉수대가 있기 전에는 소나무가 무성하여 솔산이라고 불렀던 것이 한자로 소을산이 되었다. 그 뒤에 봉수대가 있었기에 봉화산이라고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의 봉수로는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에는 기름과 나무로 횃불을 올려서 신호를 하였다. 외국에서 침입하는 국난이나 지방에서 일어나는 내란이 있을 때에는 횃불을 들고 서울에 있는 경봉수(京烽燧)까지 운반하였다 하며 진천서 경봉수까지는 4시간이면 도착하였다고 한다. 봉수의 요령을 살펴보면, ① 평상시에는 한 개의 횃불을 올리고, ② 적이 우리나라를 침범하려는 기색이 보이면 두 개, ③ 적이 국경에 이르면(즉 압록강을 건너오거나 현해탄을 건너서 부산 지방에 나타나면) 세 개, ④ 국경을 넘어서 침범하여 오면 네 개, ⑤우리 군사와 침략군과 접전이 시작되면 다섯 개의 횃불을 들어서 알렸다고 한다. 옛날에 봉화산에는 수직실이 있었는데 5간(五間) 기와집이었다. 거기에 화기 철가, 삼지창(끝이 세 갈래로 된 창), 환도, 총포 등을 구비하고 있었다. 건립연대는 상산지를 보면 무신적변이 있은 뒤에 영조대왕의 특명으로 설치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 곳에 가서 보면 사방을 석축으로 쌓은 자리가 남아 있다. 한 변이 9m 높이가 90cm로 되어 있다. 또 불을 때던 자리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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