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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학년 독서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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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반)내조의 왕비 소헌왕후
작성자 권수인 등록일 16.08.09 조회수 234

내조의 왕비 소헌왕후를 읽고

소헌왕후는 집안은 조선 초기의 명문가인 청송 심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심덕부는 이성계의 위화도 화군을 도와 공신에 오르고 조선 건국 후엔 좌정승을 지냈다.

또한 아버지인 심온 역시 능력을 인정받아 판서를 두루 거친 뒤 영의정을 지냈다.

소런왕후는 1408년에 태종의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과 혼인한 후 경숙 옹주에 봉해져 있다.

줄거리:어느날 충녕대군은 자식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충녕대군의 형인 효령대군이 급히 찾아왔다.

효령대군은 아바마마께서 세자저하를 폐위 하실것 같다고 말을 하였다.

대신들이 저하를 폐위시키고 충녕대군을 새 왕새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청을 드렸다고 하였다.

양녕 대군은  자유분방한 성품으로 풍류를 즐겨 왕세자에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태종은 자기처럼 보위를 두고 형제간에 피를 흘리는 것을 원치 않아 장자가 왕위 잇기를 바랐다.

그래서 양녕 대군이 학문을 멀리하고 궁궐을 몰래 나가 사냥하거나 기생집에 드나들어도 용서했다.

하지만 방탕한 생활이 도를 넘자 결국 양녕대군을 폐위시켰던 것이다.

1418년,태종은 세자의 행실을 문제삼아 폐위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 8월에 양위 하였다.

그가 조선의 제4대 임금 세종이고,부인 심씨가 소헌왕후이다.

테종은 양녕대군이 세자일 때도 양위하겠다고 몇먼소동을 일으켰다.

이것은 신하들의 충성심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였지만,세종에게 양위한 것은 진심이었다.

세종은 갑자기 세자가 되었고,또 위로 두 형이 있어 태종이 죽고 난 뒤에 즉위하면 왕권이 흔들릴 수도 잇었다.

그래서 태종은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선위하여 세종이 정사를 잘 돌보도록 가르치고 왕권을 튼튼히 하려고 했던 것이다.

한편 이때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은 영의정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사은사로 떠났다.

그런데 갑자기 고문받던 강상인 영감이 심온 대감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고 하였다.

상왕전하는 군사권을 쥐고 있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다.

게다가 마마의 숙부가 그런말을 들었다고 자백 하였다.

강상인은 태종이 즉위하기 전부터 가신이었으며 왕위에 오느는데 공을 세워 병조 참판까지 올랐다.

강상인은 고문 끝에 심온의 동생 심정과 함께 심온이 "군사는 한곳에서 나와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거짓 자백을 하였다.

하지만 강상인은 죽을때,"나는 죄가 없는데 매를 견디지 못해 죽는다."는 말을 남겼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강상인과 심정,박습 등 관련자들이 처형되었고,또한 소헌왕후의 어머니와 동생들 마저 노비 신분이 되었다.

그리고 결국 명나라에서 아무것도 모른채 돌아온 심온은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 뒤 1420년에 원경왕후가 세상을 떠났고,태종은 1422년에 숨을 거두었다.

소헌왕후는 8남2녀를 낳았는데 모두 영특하고 재주가 뛰어났다.

척째 문종은 즉위 전부터 나라를 다스렸고,둘째 수양대군은 즉위하여 세조가 되고,셋째 안평대군은 시문.글씨.그림에 뛰어났으며 넷째 임영 대군은 총통과 화차를 제작했다.그리고 정의 공주는 음운에 밝아 수양,안평 대군과 함께 한글 창제에 힘을 보탰다.

소헌왕후는 세종이 수라상을 받으면 직접 맛을 봐 도이 잇는지 살폈으며,세종이 후궁들ㅇ르 들여도 질투는 커녕 왕자들의 양욱을 맡길 정도로 믿고 가까이 하였다.

1426년에는 세종이 강원도에 간 사이 한성에 큰 불이 나자 소헌왕후는 앞장서 화재 진압을 지휘했다.

충격으로 몸이 상한 소헌 왕후는 결국 1446년에 소헌왕후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의 집에서 생을 마감 하였다.


생각과 느낌:나는 왕비나 여왕이 되면 아무 걱정없이 엄청 편하게 살수 있을줄 알았는데,엄청 힘들고 나라일에 많이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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