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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작성자 박을석 등록일 11.11.09 조회수 117

우리 학생 여러분께는 어려운 말들이 더러 있을 수 있겠지만, 한 번 읽어보고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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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 김형완

[한겨레] 2011.11.07  인권은 익숙한 상식에 질문하기, 되묻기다

»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

초등학교 4학년 한 학급에서 ‘왕따’가 발생했다. 성재(가명)는 점심도 혼자 먹기 일쑤고, 짝을 원하는 친구도 없다. 담임 선생님이 학급 친구관계에 관한 설문조사를 해보니 좋아하는 친구는 제각각 다양하게 나타났는데 싫어하는 친구는 오직 한 사람, 성재를 지목했다. 이유는 성재가 뚱뚱해서 “지저분하다”, “냄새 난다”, “게으르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단정적으로 말한다. “뚱뚱하면 씻는 것도 귀찮아하잖아요.”

이런 모멸을 견뎌야 했던 11살짜리 어린아이의 심경은 어땠을까. 살면서 언제가 가장 슬펐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성재는 잠시 머뭇거리다 “친구들에게 버림받을 때”라고 답한다. 대답하는 아이의 표정이 순간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르게 일그러진다.

 

선생님은 교육전문가, 학부모와 함께 숙의한 끝에 ‘역할 바꾸기’ 실험을 한다. 키 140㎝를 기준으로 작은 아이들은 우등반, 큰 아이들은 열등반으로 나눈다. 오직 키를 기준으로 우열을 나눈 것이다. 아이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한쪽에선 머리털 때문에 실제보다 키가 크게 재졌다고 항의하는 아이가 나오고, 신발에 양말까지 벗고 다시 재겠다는 아이도 있었다. 선생님은 수업 중에 우등반 아이들에겐 칭찬을 아끼지 않고, 열등반 아이들에겐 노골적으로 핀잔을 주었다. 열등반 아이들은 혹시 또 지적을 받진 않을까 잔뜩 긴장하는 바람에 평소 안 하던 실수를 연발했다. 반대로 우등반 아이들은 수업집중도가 눈에 띄게 높아지기 시작했고, 자신감이 넘쳤다. 칭찬이 자존감을 높여 능력을 배가시킨 반면, 차별은 있던 자신감마저 잃게 했다. 열등반 아이들은 하나같이 억울해하고, 화내고, 끝내 울먹였다. 수업 태도가 산만해지는 건 당연했다. 선생님이 싫어졌다는 아이, 전학 가겠다는 아이, 학교 다니기 싫다는 아이가 속출했다. 항의와 불만은 시간이 흐를수록 격렬해져 갔다. 어느 누구도 ‘합리’니 ‘차별’이니 하는 단어를 가르쳐준 적 없건만, 아이들 입에서는 자연스레 “(선생님이 우리를) 불합리하게 차별한다”는 말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며칠 후 선생님은 열등반 아이들을 따로 조용한 곳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동안 느낀 심정을 말해보라고 했다. 아이들은 말문을 열기도 전에 너나 할 것 없이 대성통곡부터 하였다. 굳이 무슨 말이 따로 필요했겠는가. 꽤 오래전 <교육방송>에서 방영된 이 다큐 프로그램은 볼 때마다 새롭고 가슴을 저며 온다.

 

왕따는 언뜻 특정 피해자에 대한 다수의 가해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두를 피해자로 전락시킨다. 언제든, 누구든 피해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맹목적으로 집단결속이 강화되고, 편견을 확대재생산하여 더 가혹한 행동을 일삼는다. 그런데 상대의 고통이 커질수록 자신의 불안감 또한 불어나기 마련이어서 결국 모두가 잠재적 피해자, 열패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편견은 종종 상식의 자리를 꿰차고 앉아 세상의 합당한 이치를 전도시킨다. 편견과 차별은 동전의 양면처럼 한 몸통을 이뤄 차별이 편견을 낳고, 그 편견이 다시 차별을 강화시키는 악순환에 빠지게 한다. 편견에 익숙해지면 차별은 눈에 띄지 않는다. 아무리 불합리한 것도 원래 그러한 것,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그래서 인권은 익숙한 상식에 질문하기, 되묻기부터 시작한다. 합의되거나 검증되지도 않은 기준을 잣대로 사람의 우열을 가르지는 않았던가. 성적으로, 재산으로, 성별로, 직종으로, 심지어 용모나 출신지역으로 사람을 줄 세워 잉여 또는 열등으로 치부하진 않았는가. 이 과정에서 양산된 억울한 사람들의 외침과 분노에 과연 귀 기울였던가. 나의 즐거움, 행복 뒤에 스며 있을지 모를 이웃의 고통과 불행에 과연 얼마나 마음을 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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