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편지 85호(정인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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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제천제일고 | 등록일 | 16.11.01 | 조회수 | 105 |
양명학 연구의 대가인 선생은 한학자로서도 유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식을 바로잡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 역사학자로도 명성을 떨쳤다. 1893년 서울에서 태어난 선생은 1950년 사망 당시까지 나라의 독립과 애국을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92년, 건국훈장을 추서받기도 하였다.
1905년 강제 을사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벼슬에 대한 뜻을 버리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당시 절친한 사이였던 최남선이 변절하여 친일행위를 일삼자 “내 절친한 친구 육당은 죽었다.”라 말하며 상복을 차려입고 그의 집에 찾아가 통곡을 했다고 한다. 이를 본 최남선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며 애국으로 돌아섰으나, 결국 다시 변절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자신을 찾아온 최남선을 향해 문도 열어주지 않으며 모질게 대하였다고 한다.(하지만 훗날 최남선을 변호를 맡아주며 남은 우정을 지키려했다고 한다.) <뼈대와 지조있는 가문> 선생의 집안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이름 있는 가문이었다. 명문가답게 선생의 집안에는 큰 수확을 거둘 수 있는 전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10년 일제치하로 들어서면서부터 나라의 독립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느라 훗날에는 단칸의 집 한 채도 없이 빈곤한 삶을 사는 선비가 되었다고 한다. <청렴결백의 표본> 국권을 회복하게 되면서 선생은 좋은 기회로 국학 대학 학장으로 국어와 역사를 가르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위에 걸맞은 모든 혜택을 뿌리치고, 승용차 대신 전철로 출근하며 타의 모법이 되는 수수한 생활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혼을 판 학자에게는 냉수 한 그릇도 아까운 법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청백한 학자로서의 모범을 보였다. ※ [출처]: 역사속 청렴이야기(정인보 편) / 레드휘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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