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제일고등학교 로고이미지

부패방지클린센터

RSS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카카오톡 공유하기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네이버밴드 공유하기 프린트하기
청렴 편지 제71호(대접받기를 거부했던 조선의 백이(伯夷))
작성자 제천제일고 등록일 15.07.31 조회수 157

 

<「청렴-충북교육」 청렴 편지 제71호 >

 

 

 

대접받기를 거부했던 조선의 백이(伯夷)

 

 

조선 중기의 문신 임광의 본관은 풍천(豊天)으로 자는 자정(子瀞). 사헌부감찰 익신(翊臣)의 아들이다. 광해군 1년(1609) 사마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 들어가 재사(才士)로서 이름을 떨쳤으나, 정치가 지러움을 보고 낙향하여 공직에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순릉참봉이 되었다가 이듬해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풍저창직장(豊儲倉直長, 궁궐에서 소요되는 쌀, 콩, 종이류 등을 담당하는 관청인 풍저창의 종7품 관원)을 거쳐 승정원주서․성균관전적․호조낭관․병조낭관․정언․지평을 지냈으며, 방 수령으로 나가 함종현령과 영광군수를 지냈다. 다시 중앙관직에 돌아와 홍문관수찬․사헌부장령이 되고 암행어사로 평안도지방에 내려가 지방행정을 바로잡았다.

 

 

임광은 한결같이 법을 지키면서 절의를 꺾는 일이 없었는데, 다음 일화는 이러한 임광의 성품을 잘 보여준다. 임광이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의 일이다.

 

임광 일행이 일본에 도착하자, 일본인들은 갖가지 좋은 음식을 내놓으며 그를 극진히 대접하였다. 그러나 임광은 아침저녁으로 일본인들이 대접하는 음식은 돌아보지 않고 자신들이 준비한 보잘 것 없는 건량(乾糧, 가지고 다니기 쉽게 만든 음식)과 변변치 않은 반찬만을 먹을 뿐이었다. 일본인들은 혹시 임광이 자신들의 대접을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아 그러는 줄 알고 그에게 물었다.

 

                                      

“공은 어째서 이곳에 와서 이렇게 변변찮은 음식을 드십니까? 저희가 이곳에 나는 좋은 것들로 만든 음식을 보내오니 사양치 말고 취하시길 바라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나라의 일로 이곳에 온 것이지 대접을 받고자 하여 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공무를 모두 마치고 나니, 일본인들이 바친 쌀과 갖가지 음식들이 고스란히 남게 되었다. 임광은 남은 쌀과 음식을 문안 오는 일본 사람들에게 다시 나누어 주었다. 이 소문이 일본을 다스리는 관리에게 전해졌다.

“조선에서 온 이가 저희가 문안을 가면 음식을 내어 줍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일본 관리는 크게 감탄하고 임광이 일본인들에게 다시 나누어준 쌀과 음식을 금 170근으로 바꾸어 보내었다. 그러나 임광은 이것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이것을 제발 받아주십시오. 저희가 이것을 그대로 가지고 돌아가면 저희 장군님께서 저희를 크게 벌하실 것입니다.”

임광은 금을 가져온 일본인들이 자신의 앞에 엎드려 애걸복절하자, 어쩔 수 없이 금을 받았다.

그러나 임광은 일본에서 조선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받은 금을 바다 속으로 모두 던져 버렸다. 지금까지 그 곳을 투금해(投金海)라고 부른다.

 

 

당시의 여러 신하들이 이를 두고 칭송하면서“임공은 지금 세상의 백이(伯夷)이다.”라고 하였다.

‘백이’는 잘 알려진 것처럼 중국 은나라 말에서 주나라 초기의 현인으로,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의 주왕을 치려고 했을 때 아우인 숙제(叔齊)와 함께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주나라의 녹(祿)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숨어 살다가 굶어 죽었다는 사람이다.

임광이 백이라 불리운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임광의 청렴함이 얼마나 철저히 보여졌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 출처 『신계영문집(申啓榮文集)』

이전글 청렴 편지 제72호(머리와 수염이 허옇게 세도록 산성을 쌓다)
다음글 청렴소식지 2015-4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