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효정 편액(안에 건 긴 액자)에 써 있는 한문을 번역하였고 첨부한 것은 원문입니다.
寶城吳氏三世孝閭記 보성오씨삼세효려기 보성오씨 3세 효자문 기록 余嘗聞寶城吳氏先有 四世三孝 出天卓異之行與感 而起敬者爲有年矣. 여상문보성오씨선유 사세삼효 출천탁리지행여감 이기경자위유년의. 내 일찍이 보성오씨 선조에 4대에 3효자가 뛰어난 행실과 마음가짐에서 뛰어나다는 것을 들었는데 존경을 불러일으킨 지 몇 년이 되었다. 此其贈 戶曺左郞守分堂諱尙健 贈童蒙敎官睡閒堂諱振澤. 차기증 호조좌랑수분당휘상건 증동몽교관수한당휘진택. 호조좌랑이 수분당 휘 상건에게 증여되고, 동몽교관이 수한당 휘 진택공에게 증여되었다. 兩公之旌閭 創建于德地里. 양공지정려 창건우덕지리. 두분의 정려문을 덕지 마을에 처음으로 세웠다. 主鬯家之門 盖爲愼重檢護益圖 久遠之計也 주창가지문 개위신중검호익도 원구원지계야 제사지내는 문을 숭상하는 것이 더욱 신중하고 검소하게 보호하는 것을 더욱 오래도록 계획이 되어야 할 것이다. 謹按守分堂公 性本孝友事親奉先克盡誠禮 근안수분당공 성본효우사친봉선극진성례 조심하여 살펴보니 수분당공은 성품이 본래 부모에게 효도하게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고 부모를 모시고 조상을 모시기를 극진히 정성을 다하시는 분이시다. 嘗有親瘠嘗糞察症 以噞欲歇倞 有喘痧口吸竹筒引出其痰 상유친척상분찰증 이엄욕헐경 유천사구흡죽통인출기담 일찍이 부모가 야위어지자 변의 맛을 보고 살피고 입을 벌려 허한 원인을 찾아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였다. 심한 기침이 있어 죽통을 입에 넣어 가래(담)를 빨아내고 祈廟血指賴以復甦 及遭共喪結廬 殯側啜粥處 土哀毁踰制三年如一焉 祈廟血指賴以復甦 及遭共喪結廬 殯側啜粥處 土哀毁踰制三年如一焉 조상에게 기도하고 손가락에 피를 내어 먹게 소생하게 했다. 그리고 상을 당하혀 염집을 짓고 빈소를 만들어 죽을 먹고 흙에서 생활하며 슬퍼하여 몸에 뼈가 드러났는데 3년을 하루같이 했다. 嘗尋書齋於江上揭忠孝 二字於門楬恒讀朱書孝經 義理耒學者多成就顯揚也 嘗尋書齋於江上揭忠孝 二字於門楬恒讀朱書孝經 義理耒學者多成就顯揚也 일찍이 강에서 목욕재계하고 책을 읽었으며 문푯말에 충효 두 글자를 걸어놓고 항상 주자와 효경을 읽었다. 옳음과 이치를 분명히 밝혀 알고 풀어 이해하고 학문에 정진하는 사람은 대부분 성공을 하여 이름을 알리는 법이다. 在英廟己酉 因道啓幷下三世給復之典 재영묘기유 인도계병하삼세급복지전 영조임금 을유년(1765년) 관찰사(도신)의 아룀으로 함께 3세에 급복(조선 시대에, 충신ㆍ효자ㆍ절부 등에게 요역과 전세 이외의 잡부금을 면제하여 주던 일)의 은전을 내렸다. 正廟丙午蒙褒贈 정묘병오몽포증 정조 임금 병오년(1786)에 다시 상을 내렸다. 憲廟己亥 命加施旌于睡閒堂公 克遵庭訓事親奉先一如佐郞公造 헌묘기해 명가시정우수한당공 극준정훈사친봉선일여 좌랑공조 헌종 기해년(1839년) 수한당 공에게 가훈을 준수하고 부모와 조상을 한결같이 잘 모신 공로로 호조좌랑을 하사하고 정문을 세우게 하였다. 憂廬墓哀禮俱 盡當親忌日適値連霖市道不通祭需未具方悶然泣號 우려묘애례구 진당친기일적치련림시도불통제수미구방민연읍호 묘막에서 슬픈 마음으로 예를 갖추고 부친기일을 맞이하여 정성을 다했고 긴 장마를 만나 시장에 갈 수 없게 되어 제수를 마련하지 못하고 넋이 나가 울고 있을 때, 忽有山鷄鳴入畜狗 銜置人前若敬獻之狀奇 而用奠又致齊之 홀유산계명입축구 함치인전약경헌지상기이 용전우치제지 홀연히 산닭이 울며 들어와 집개가 물어 바치니 공경하게 드리는 모양과 같기에 기이하였다. 그것으로서 제수를 차리고 제사를 지냈다. 傺狗將産 雛甚憂欠潔狗忽自避罷 제구장산 추심우흠결구홀자피파 힘이들어보이는 개가 산기가 있어 부정탈까봐 심히 걱정을 하니 개가 스스로 피하여 집을 나갔다. 事之後含雛而歸鄕隣稱孝感所致也 사지후함추이귀향린칭효감소치야 제사가 끝난 후에 강아지를 물고 집에 돌아왔는데 이웃사람들이 효도에 감동하여 그런 일이 이루어졌다고 칭찬하였다. 嘗服習于同春尤菴宋文正公兩先生門互相推重雍容一席談論道義 상복습우동춘우암송문정공양선생문호상추중옹용일석담론도의 일찍이 동춘당 송준길 선생과 우암 송시열 선생 문하에서 공부를 했고 서로 공경하고 받들었으며 온화한 표정을 가지고 한 자리에서 도의를 논하였다. 憲廟己亥蒙 褒贈 哲廟庚戌 命加施旌永慕齋公乃其曾孫也 헌묘기해몽 포증 철묘경술 명가시정영모재공내기증손야 헌종 기해년(1839년)에 포상이 되었고 철종 경술년(1850년) 영모재공으로 시호가 내려졌고 수분당공의 증손이 된다. 自幼誠孝根天母有急病聞醫云難治 자유성효근천모유급병문의운난치 어려서부터 하늘에 근본하여 정성된 효성이 있었다. 어머니가 갑자기 병환이 있어 의원이 낫기가 여렵다는 말을 듣고 公惧然不寐七晝夜幸以得甦 공구연불매칠주야행이득소 공이 두려워하여 7일 밤낮으로 잡을 자지 않았는데 다행히 소생하셨다. 祖嘗患痁思食魚膾 公號泣江于 忽有氷鱗躍出得以供具 조상환점사식어회 공호읍강우 홀유빙린약출득이공구 일찍이 할아버지가 학질에 걸려 물고기 회가 먹고 싶다하여 강가에서 소리높여 울고 있을 때 홀연히 얼음으로 잉어가 뛰어올라와 잡아서 드렸다.
父患割血指而得迎數日遭表 侍墓雪不留濕後因居廬揭以 永慕寓終身慕之意也 부환할혈지이득영수일조표 시묘설불류습후인거려게이 영모우종신모지의야 아버지가 아파서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어 수일동안 더 살 수 있게 하엿다. 여막 옆에서 모시며 눈이 오면 습기가 머루르지 않게 한 후에 여막에서 거하며 부모님을 받들고 항상 사모하여 종신토록 여막에 살며 부모님을 생각하였다. 嘗受業于蒼巖宋先生 상수업우창암송선생 일찍이 송선생에게서 공부를 했는데, 先生稱以吾不如又受業于遂庵權文純公闡明道義 선생칭이오불여우수업우수암권문순공천명도의 선생이 칭찬하기를 내가 그대보다 못하다 라고 했고 또 수암 문순공 권상하(權尙夏)에게서 공부를 했는데 도의를 공부했다. 與夢窩金忠獻公爲道義交當 忠獻公仗義之 여몽와김충헌공위도의교당 충헌공장의지 그리고 몽와 김창집(金昌集: 시호 충헌)과 도의로서 교분을 나누었다. 충헌공은 의리를 소중히 하는 분이었다. 日儉嚴程治膰荐棘 公稱以學質高明吾人難能之事 일검엄정치번천극 공칭이학질고명오인난능지사 날이 지나가자 검소하고 엄격하게 정도에 맞는 제수를 준비하여 자신을 죄인이라 칭했다. 충헌공은 배움으로써 자질이 식견을 높임이는 것이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다라고 영모재공을 칭찬했다.
英廟給復之 恩以生前慚惶不受至 영묘급부지 은이생전참황불수지 영조 임금이 다시 은전을 내리니 생전에 은전을 베풀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여 은전을 내렸다. 哲廟庚戌始蒙 贈童蒙敎官 獨未及施苑又而孝閭 철묘경술시몽 증동몽교관 독미급시원우이효려 철종 경술년(1850년) 처음으로 동몽교관을 증여하였다. 그것이 원(苑)을 내리는 것에는 못미치나 효려(효자각)을 내렸다. 三架六楹空其一間者 以待公 恩命之續下也 삼가육영공기일간자 장이대공 은명지속하야 삼가육영의 기와집이고 1칸은 빈공간으로 되어 있고 공을 모시는 곳이다. 임은명(임금의명령)이 현판 아래에 쓰여 있다. 而于今未就公議齊鬱然 이우금미취공의제울연 그러나 오늘날까지 공의 모든 찬란함의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錦谷宋先生嘗題其門額曰 三孝此足以補 朝家未遑之典爲同一之徵也 금곡송선생상제기문액왈 삼효차족이보 조가미황지전위동일지징야 금곡 송선생(宋來熙) 일찌기 그 효려문 현판을 쓰고 삼효자는 이렇게 임명이 됨으로 만족스럽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조정에서 은전을 내릴 겨를이 없음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噫孝者雖人子當行之若吳公孝 희효자수인자당행지약오공효 아! 효란 자식이 마땅히 행해야야 할것이라도 오공과 같은 효행은 至感天應物者則古亦幾希少 無遜乎王鯉 孟笋之類而幷萃 一門尤爲難焉 지감천응물자칙고역기희소 무손호왕리 맹순지류이병췌 일문우위난언 하늘이 감동을 하여 보상을 한 것인데 즉 예전에도 거의 드물었고 왕리와 맹순 등과도 뒤지지 않으며 더구나 한가문에 이런 효자가 여럿이 나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詩曰毋念爾祖聿修厥德 令其吳氏子孫以公之心 시왈무념이조율수궐덕 영기오씨자손이공지심 시경에 ‘너의 조상을 생각하여 덕을 닦으라’는 이 말이 오공의 마음으로써 오씨자손들로 하여금 이것을 실천하게 하였다. 爲心厚追遠篤養生使無愧於出入是門 위심후추원독양생사무괴어출입시문 이것은 마음을 후덕히 하고 조상을 추모하여 공양을 게을리 하지 않고 모심을 새롭게 하도록 하여 이 문을 드나듦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는 것이다. 公之精靈其必曰予有後矣 공지정령기필왈여유후의 공의 혼령들은 반드시 나는 후손이 있다 말 할 것이다. 凡他人士自通而遠莫不觀感而矜式焉則 범타인사자통이원막불관감이긍식언칙 무릇 사람은 스스로 깨닫게 되겠지만 감동과 모범됨을 보지 못할 것이다. 列聖朝褒揚之意 儘可謂有存盍相與愓勉也哉 열성조포양지의 진가위유존합상여상면야재 곧 열성조(여러임금)의 표창이 해와 같이 빛나는 뜻을 다할 것이며 어찌 서로 더불어 삼가고 노력해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公之後孫泰均甫帶三孝實記 공지후손태균보대삼효실기 공의 후손인 태균(泰均)씨가 이 삼효자의 실제의 일을 기록하기 위하여 一丹訪余於 莎鄕 樵牧之社 일단방여어 사향 초목지사 우선 배우지 못해 識見이 좁은 사람인 나를 찾아와 講先誼 請揚文 余非其人 屢辭不獲 爰就合稿僅摭其事實 顚末是爲記 강선의 청양문 여비기인 누사불획 원취합고근척기사실 전말시위기 말하길 먼저 선조의 뜻을 알리고 문장을 만들기를 청하였는데 나는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여러번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쓴 것을 합하고 삼가 사실들을 처음부터 끝가지 조사하여 이 기록을 만들었다. 癸亥小春上澣成均進士花山后人 金昌圭 記 계해소춘상한성균진사화산후인 김창圭 기 계해년(1863년) 음력 10월 초순 성균관 진사 화산 김씨 김창규
참고자료 1. 2017년 9월 26일 청주시청 문의 답변: 보성오문삼효각 청주시 향토유적 유형 제73호 2. 보성오씨삼효각(寶城吳氏三孝閣)은 충청북도 청원군 현도면 달계리(達溪里) 현도초등학교에 있는 효자각으로 수분당오상건(吳尙健1590-1657), 수한당오진택(吳振澤1615-1691), 영모재공오정기(吳鼎基1660-1734)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1765년(헌종 5)에 효자로 급복(給復, 조선시대에 충신.효자 등에게 요역과 전세 이외의 잡부금을 면제하여 주던 일)된 오상건(吳尙健)과 1851년(철종2)에 명정된 그의 아들 오진택(吳振澤), 그리고 손자 오정기(吳鼎基)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이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1950년에 중건하고 1978년에 보수한 것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사면을 홍살로 막고 안에는 3인의 효자문 편액을 걸었다. 밖에는 ‘삼효정(三孝旌)’이라 쓴 현판이 달려 있으며, 효자각 아래에 1971년 한글학자 눈메 한갑수가 찬서(撰書)하여 세운 보성오문삼효각비(寶城吳門三孝閣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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