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백곡 김득신을 아시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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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주형식 | 등록일 | 14.09.25 | 조회수 | 3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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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백곡 김득신 - 증평군 율리에 그의 묘소가 있으며, 주변에는 조선시대 때 인조반정과 관련 있는 사연이 깃든 좌구산, 올레길로 새로 단장한 삼기저수지 등이 있다. 좌구산 관리사무소 부근에는 여러 개의 콘도 등 휴양시설이 있다. 아내와 삼기저수지 둘레를 걷다가 김득신 좌상조각에서 사진을 찍고 그의 시 하나를 메모장에 옮겼다.
밤티골 가는 길에
맑은 새벽 길 떠나는 나그네(객자박청효) 가도가도 언덕은 길기만 하네(행행롱판장) 찬 연기는 오랜 절에서 나고(냉연생고사) 뭇 나무들은 층층 언덕에 서있네(군목입층강) 바위 아래 샘물 소리 울리고(암저명천향) 숲 사이로 달빛이 비치네(목간사월강) 봄을 맞아도 아직 돌아가지 아니함은(봉춘유미반) 이리와 승냥이를 피하기 위함이라네(지위피시랑) 시랑은 이리와 승냥이 <소개 1> 인터넷에서 정리 「백이열전」을 1억 1만 3천 번이나 읽은 조선의 선비 조선 시대의 사대부들은 대나무 가지에 횟수를 표시해 가면서 독서를 할 정도로, 책을 반복해서 읽고 외우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김득신처럼 1만 번을 넘을 정도로 책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도대체 왜 김득신은 이토록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천문학적인 독서를 했을까? 명문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김득신은 당시 사대부의 자식들보다 뒤늦은 10살이 되어서야 겨우 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한심할 정도로 공부를 못했다고 합니다. 배우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기억력의 소유자였던 것입니다. 과거에 급제한다는 꿈은커녕 '까막눈'이나 면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글공부를 포기하라고 할 정도였다니까, 그의 우둔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우둔함과 주변의 힐난과 멸시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특별한 방법으로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습니다. 그 특별한 방법이란 다른 사람이 몇 십 번 읽을 때 자신은 몇 백 번 혹은 몇 천 번을 읽고, 또 다른 사람이 몇 백 번을 읽으면 몇 만 번을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공부 방법을 통해 김득신은 비록 남보다 뒤늦은 나이인 59세였지만 과거에도 급제하고 또한 당대를 대표하는 명 시인의 반열에도 올랐습니다. 그런데 김득신이 자신만의 특별한 공부 방법을 개발하고 꾸준히 노력하여 남부럽지 않은 학문적 성취와 명성을 얻을 수 있기까지, 그에게 끊임 없이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숨은 공로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김득신의 아버지인 김치였습니다. 그는 자식의 우둔함을 나무라기보다는 오히려 꾸준히 성실하게 공부하는 자세를 남들에게 자랑했습니다. 또 과거시험은 커녕 나이 스물이 다 되어서야 비로소 글을 짓는 자식을 보고서도, 꾸짖기보다는 꼭 과거를 보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니니 더 노력하라는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듯 아버지의 변함 없는 믿음과 지원때문에 김득신은 자신감을 잃지 않고 더욱 학문에 매달릴 수 있었습니다. 학문에 재주가 없으니 글공부를 때려치우라는 주변 사람들의 끊임 없는 힐난과 멸시 속에서도 김득신이 꿋꿋이 노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릴 때부터 자신을 믿어주고 격려해 주면서 자신감을 심어준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첨부에 계속)
(더 읽기 자료는 <첨부>에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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