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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김예슬씨의 글을 읽으며 / 이계삼
작성자 정진기 등록일 10.03.12 조회수 298
[세상읽기] 김예슬씨의 글을 읽으며 / 이계삼
[한겨레신문] 2010년 03월 12일(금) 오후 08:16   가| 이메일| 프린트
[한겨레]
“이제 대학과 자본의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떡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 동시에,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대학생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씨의 글을 읽는다. 숨죽이며 읽고 또 읽는다. 나는 그의 글이 한편의 기다란 시라는 생각이 든다. 유신 치하에 숨막히던 이들에게 던져진 김지하의 시가 그러했을까. 나는 하루종일 그의 글이 준 감동과 충격 속에 있었다.

김예슬씨는 “스무 살이 되어서도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고 그랬다. 대학생이 된 아이들이 찾아와 풀어놓는 대학의 풍경은 듣다 보면 하나같이 눈물이 날 것처럼 가슴이 꽉 막히는 이야기들이었다. 초·중·고 12년을 대학 하나만 바라보고 내리닫게 채찍질을 했다. 그렇게 진입한 ‘약속의 땅’이었건만, 그들을 정신적 백치가 되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는 굴레 속으로 다시 밀어넣는다. 그렇게 4년을 내달리게 하고서도 끝내 그들을 청년실업자로, 비정규직으로, 신용불량자로, 나이 서른이 다 되어도 제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른아이’로 빚어내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인재 양성 과정’이 아닌가.

8년 동안 교원 임용고사를 본 사람을 알고 있다. 70 대 1의 경쟁을 뚫고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졸업생 아이의 수험 체험담을 들은 적이 있다. 네번째 치른 임용고사에서 결국 떨어지고 ‘벌집’이라 부르는 고시원을 나와 노량진 거리를 걷는데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유행가에 눈물이 흘러서 선 채로 울었다는 사범대 졸업생의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김예슬씨의 글을 읽기 전까지 며칠 동안 나는 최근 들어 <녹색평론>에 자주 소개되는 ‘사회신용론’과 ‘기본소득’에 관한 글을 읽고 있었다. 밑줄 긋고 공책에 옮겨 적으며 나는 사뭇 진지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은 ‘돈’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학이 이 모양인 줄 알면서도 왜 대학을 가기 위해 이 난리들인가. 대학을 통과해서 기업에 고용되지 않고서는 ‘돈’에 접근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은 어디에 있는가. 돈은 은행에만 있고, 서울에만 있고, 상위 2%에게만 있다. 오늘날 돈은 분명 과잉인데도 국가도 기업도 돈이 모자라 끝없이 돈을 빌리고,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몸부림치고, 결국 사람 몫으로 돌아갈 돈을 가로챈다. 그래서 정규직은 비정규직이 되고, 비정규직은 구조조정된다. 돈이 필요한 곳에 돈이 가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돈’의 노예이다. 그러나 사회신용론은 이 문장을 수정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모두 ‘은행권’의 노예라고. 그러므로 공공통화를 발행하여 은행을 통하지 않고 모두에게 기본적인 필요를 충당할 권리 증서를 나눠주자는 것이 사회신용론의 결론이다. 가장 나중에 온 포도원 일꾼에게도 똑같은 삯을 나누어준다는 예수의 비유처럼, 누구에게나 기본적 필요를 충당할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는 자본가와 창의적인 몇 사람이 아니라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협력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자연의 선물이며 인류의 축적된 유산이기 때문이다.

김예슬씨가 앞으로 어떤 인생길을 걸어갈지는 궁금해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그는 바로 지금 숨이 막힐 것 같은 이 시절, “쓸모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길을 잃는다”는 강렬하고 아름다운 인간 선언의 주체로 남았다. 그의 결기가 한순간의 치기로 전락하지 않게 하는 것은 김예슬씨가 져야 할 책임이 아니다.

이계삼 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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