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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정기답사(탑동일원)
작성자 이재학 등록일 09.07.10 조회수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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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aN 7월 정기 답사 

■ 답사지역 : 현풍곽씨(玄風郭氏)의 사효정려(四孝旌閭) 및 탑동 5층 석탑

(청주시 상당구 탑동 251번지)

■ 현풍곽씨(玄風郭氏)의 사효정려(四孝旌閭)

  <곽여찬(郭汝贊)>

순조(純祖) 때의 사람으로 네 살에 부친을 여의고 편모(偏母)를 지성으로 봉양하며 늙도록 효도를 다하였다. 어머니 상 때에는 비바람을 가리지 않고 성묘하였다. 어려서 아버지 상을 입지 못하였던 일을 한탄하더니 그의 회갑에 이르자 한이 맺혀 상복을 갖추어 상례(喪禮)를 삼년간 다하니 정성이 대단하여 향리에 널리 떨치었다. 그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1817년에 정려(旌閭)되었다.

  <곽진은(郭鎭殷)>

곽여찬(郭汝贊)의 아들로 아버지의 효행을 이어받아 어머니 병환에 손가락을 자른 피로 어머니를 구한 일이 있다. 아버지 병환을 고치려고 정성을 다하였으나 약값을 마련하지 못해 도리가 없어 관가에 나가 공천(公賤-공노비)에 몸을 팔려고 하였더니, 관가에서 그 효는 가상하나 종이 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 하고 약물(藥物)을 내리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그 효심에 감동하여 800금을 희사하므로 인삼을 다려드리니 부친의 병이 나았다. 1822년에 조정에 장계(狀啓)가 올라가 1828년(순조 28)에 정려(旌閭)되었다.

  <곽진은 처 인천이씨>

친정에서 부모에 효를 다하였고, 출가하자 늙고 가난한 시모를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인천이씨(仁川李氏)는 시부모의 병을 고치고자 머리를 깎아 팔았다고 한다. 그녀의 효행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1850년(철종 1)에 정려(旌閭)되었다. 인천이씨 효자각은 남편인 곽진은 효자각내에 건립되었다.

  <곽원호>

효자 곽진은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여덟 살 때에 묘소 아래 몇 리에 걸쳐 소나무와 참나무를 심으니 후에 숲을 이루고 울창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효심에서 한 일이었다. 부모를 지성으로 섬겨 하찮은 음식과 물건이라도 먼저 드렸다. 또한 부모가 병환이 들자 손가락을 잘라 자신의 피를 부모님에게 드리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돌아가신 뒤로는 묘소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50년 동안 묘소를 지켰으며 90여 세에 여막에서 죽었다. 1852년(철종 3) 조정(朝廷)에 장계(狀啓)가 올라가 1854년에 정려(旌閭)되었다.

  <곽상조>

아명은 백수(百壽), 아버지는 곽형호(郭亨浩), 어머니는 교동인씨(喬桐印氏)이다. 큰아버지는 효자로 정려된 곽원호(郭元浩)이며, 할아버지는 곽진은(郭鎭殷), 증조할아버지는 곽여찬(郭汝贊)이다. 아들은 곽유엽(郭有燁), 곽진엽(郭晋燁), 곽최엽(郭最燁) 등 3형제를 두었는데, 곽유엽과 곽최엽은 무과에 급제하였다. 1884년 효자로 정려되어 가선대부 한성부좌윤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嘉善大夫 漢城府左尹 兼 五衛都摠府 副摠管)에 증직된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곽상조의 정려각은 따로 있지 않고 곽원호의 정려각 안에 정려 편액이 함께 걸려있다.

■ 탑동 오층석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5호) 

‘탑동’의 지명유래가 된 석탑으로 결실된 기단부와 2·3·4 층의 옥신석 및 4층 옥개석을 제외하고도 현재 높이가 3.3m이니 당초에는 6m 이상 되는 장중하고 우수한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당구 탑동 일신여자고등학교 북쪽의 개인 주택 앞마당에 있는데, 원래는 현 위치에서 서쪽으로 약 40m 지점에 도괴되어 있던 것을 현풍곽씨(玄風郭氏)의 사효정려(四孝旌閭) 옆으로 이전 복원한 것이라 한다.

상대 갑석은 2개의 돌로 조성되었으며 밑면에는 부연이 있고 윗면에는 몰딩 1단과 그 위에 각형 1단의 받침으로 탑신을 받고 있다. 상대 갑석 위의 탑신부는 옥신과 개석이 각각 1개의 돌로 조성되었는데 1층 옥신의 4면에는 양우주가 각출되었으며 그 중앙에 여래좌상 1구씩을 양각하였다. 이 좌상들은 모두 통견의 상으로 원형의 이중 두광이 있고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앉아 있는데 수인에서 차이를 보여 불상의 종류를 알 수 있게 해준다.

현재의 위치대로 본다면 동면의 상은 약기인을 취한 약사여래이고, 남쪽은 지권인을 하고 있는 비로자나불이며, 서면의 상은 항마촉지인을 취한 석가여래, 북면의 상은 설법인의 아미타여래이다. 이들 사방불은 시대에 따라 불상의 배치와 양식이 다르지만 이 석탑이 조성될 당시의 신앙형태를 나타냈을 것이다.

각층의 옥개석은 층급받침이 5단이고 처마 밑으로 낙수 홈이 음각되었으며, 윗면에는 2단의 굄으로 그 위의 옥신을 받치도록 되어 있는데 낙수면은 경사가 약간 급한 편이다. 전각의 경쾌한 반전으로 둔중한 느낌을 면하고 있다. 실측치는 전체높이 326㎝, 상대갑석 한 변 길이 192㎝, 높이 20㎝, 초층옥신 높이 87.5㎝, 폭 95.5㎝, 사면의 여래좌상 높이 81.5㎝, 어깨 폭 36.5㎝, 무릎 폭 56㎝, 연화좌폭 59.5㎝이다.

원래는 이중기단의 5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현재는 상대 갑석 이하의 기단부가 결실되고 탑신부도 3층만이 남아 있다. 탑신부인 초층의 탑신석과 1, 2, 3, 5층의 옥개석이 남아 있는데, 5층 옥신석과 상륜부는 근래에 새로 조성하여 놓은 것이다. 1976년 12월 20일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제 제25호로 지정되었다.

청주에서 유일한 통일신라의 석탑이며, 특히 사방불을 배치한 양식이나 그 불상의 조각수법, 옥개석의 5단 층급받침, 기단갑석의 양식 등으로 미루어 9~10세기 초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영문요약]

This five-story pagoda is believed to date to the closing years of the Unified Silla period(668-936) of the early years of the Goryeo period(918-1392). It is from the pagoda that the surrounding area takes its name, Tap-dong, meaning "pagoda village." The lower foundation stone, the main portions of the second, third, fourth and fifth stories, the fourth story roof stone and rooftop fittings are all missing. The main body and rooftop fittings of the fifth story were restored recently. The trough-like indentions on the eaves of the roofs are for drainage. The designs in relief on each side of the first story are seated Buddh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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