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 있었다.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처음 느껴보는 어지럼증이 머릿속을 헤집는 기분이다. 곧이어 주변의 사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건 의자. 나무도 있고, 허공에 떠 있는 풍선 옆에 보이는 제각각의 건물들...이외에도 갖가지 세상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들을 찬찬히 눈에 담아보았다. 제각각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째서 존재하는지에 대한 정보도 차츰 떠오른다. 그렇게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쭉 훑어보았다. 그러기를 몇 분, 갑자기 낯선 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처음엔 혼란스럽게 이 귀에 들려오는 여러 소리들이 구별되어진다. 가장 크게 들리기 시작하는 이 소리는 조금은 날카롭지만 이상하게도 듣기 좋다고 생각이 드는 새의 지저귐. 오른쪽에서는 일정한 규칙의 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냇물의 물줄기 소리. 눈앞의 나뭇잎이 바람에 의해 흔들린다. 나뭇잎들이 서로 마찰하며 솨아아아 하고 소리를 내기도 한다. 직후, 보이지 않는 이 바람이 나에게 와 내 몸의 감각들을 일깨웠다. 머리, 몸과 팔다리가 그 연한 압력에 반응한다. 내가 서 있는 곳 주변의 잔디들이 내 발들을 간지럽히고 내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몸에 부딪히고 시야를 가리기도 하며 세상의 소리를 줄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을 나는 가만히 서서 즐겼다. 하나하나 눈을 감고 보았던 것들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그러기를 몇 시간일까, 내 머리 위에 떠 있던 눈부신 해가 하늘의 색깔과 함께 빛이 점점 연해지며 붉게 강렬해지다 이어 지평선 너머로 내려가고 반대쪽에선 달이 떠올랐다. 달은 해와 달리 더 선명하게 보였고 약간의 연주황빛을 띠고 있었다. 달의 배경인 하늘의 색깔이 점점 어두워져 간다. 구름의 색깔은 조금 탁해졌고 그 뒤에 반짝거리는 여러 개의 별들이 보이기 시작하며 달과 함께 천천히 떠올랐다. 하늘의 색깔이 어두워지듯 지상의 모든 것들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마치 그런 것들의 본래 색깔을 되찾아주려는 것처럼 나와 같이 가만히 세워져 있던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 빛을 주던 해까지는 아니었지만 그 주변은 환해져 조금이나마 다시 밝아졌다. 조금씩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을 나는 계속해서 다시 바라보고 느껴봤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일주일... 해와 달이 하늘을 번갈아가며 지나가는 것을 본 지 일주일이다. 기존에 있던 사물 몇몇의 모양이 바뀌고 세상이 조금 더 선명해지기도 하는 변화들도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 머리 위에 메리아라는 글자가 뜨기도 했다. 이제 이 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슬슬 익숙해지는 시점에, 또 다른 새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조금 이질적인 느낌이었고, 조금 먼 곳에서 났지만 이곳까지 소리가 울려왔다. 자리에서 이동할 순 없지만 그쪽으로 방향을 돌려 쳐다볼 순 있었기에 나는 그곳을 바라봤고, 그곳엔 나와 비슷한 생김새지만 제각기 다른 모습의 여러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 뒤에는 빙글빙글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푸른 빛의 포탈이 있었다. 블랙홀을 닮은 생김새였다. 그 포탈에서는 불규칙적으로 사람들이 나왔다. 역으로 포탈에 들어간 사람은 사라지기도 했다. 포탈에서 나온 사람들은 주변을 둘러보며 걸었다. 사람들이 흩어지며 점점 이쪽 방향으로 온다. 그중 가장 먼저 온 사람이 나를 발견하곤 달려왔다. 난 빠르게 움직이는 두 다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나와 비슷한 모습이었지만 모두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게 달려온 그 사람의 머리 위에는 쿤랑이라는 글자가 있었고 옆에는 2204라는 숫자가 붙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다른 글자와 숫자가 표처럼 붙어 있었다. 내 앞까지 도달한 그는 입을 움직여 소리를 냈다.
"헐 새 NPC인가? 이름이 메리아네. 안녕? 이거 지금 말 걸리나?? 얘 업뎃 내용에 없었는데..."
'NPC? 날 말하는 건가?'
그의 입에서 소리가 막힘없이 나왔다. 위에 떠 있는 글자는 이름인가. 뭔 말이지... 나는 그것을 보며 따라 대답했다.
"안녕."
"얜 근데 왜 대화버튼이 없지. 움직이는 것도 랜덤이네."
그는 그렇게 말하고선 내 주변을 돌며 나를 살펴보았다. 나는 그걸 보며 신기한 느낌의 감정이 들었다. 계속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여나 흥미를 잃고 가버릴까 나는 살짝 재촉하며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은 쿤랑이야?"
"맞어."
쿤랑은 대답하고선 계속 기다렸다. 아무래도 내가 말 하는 걸 기다리는 듯했다. 난 궁금증을 질문했다.
"너희는 플레이어야?"
"헐 엉."
"나는 NPC고?"
"엉."
"나도 움직이고 싶어."
쿤랑은 잠시 말이 없더니 갑자기 웃었다.
"인공지능 나중에 나온다고 하더니 혹시 버근가? 재밌겠다. 움직이게 해줄게."
이후 쿤랑은 멈췄다. 나도 기다렸다. 생각해보니 왜 다른 사람들이 안 보이지? 기다리며 생각하던 나는 갑작스럽게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나는 홀린 듯이 다리를 뻗었다. 한 발짝, 쿤랑 앞으로 다가갔다.
"와 생각보다 허술해서 성공함. 어때?"
나는 주변을 한 바퀴 걸었다. 새로운 감각이었다. 쿤랑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플레이어처럼 지낼 수 있게 해줄게. 더 많은 걸 할 수 있고 이거보다 더 재밌어. "
쿤랑은 그렇게 말하고선 다시 멈추더니 연이어 내 머리 위의 글자가 바뀌었다. 이제 내 머리 위에는 메리아/3923이라는 표가 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서 있던 자리가 지직거리더니 나와 닮은 캐릭터가 생겨났다.
"지금이 새벽이라 가능했지. 내가 이런 거 재미로 자주 하거든. 내가 포탈 너머 다른 곳도 구경시켜 줄 테니까 나랑 자주 놀아줘... 요즘 심심했단 말야."
그러고선 쿤랑이 포탈 쪽으로 걸어가며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멍하니 서 있다 급하게 쿤랑을 따라갔다. 속에서 두근두근하는 진동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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