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용산초등학교 로고이미지

RSS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카카오톡 공유하기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네이버밴드 공유하기 프린트하기
박팽년
작성자 용산초 등록일 07.04.16 조회수 120
시대   조선
  제목   박팽년(朴彭年)

(1417(태종 17) ∼ 1456(세조 2))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단종 복위운동 때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순천, 자는 인수, 호는 취금헌, 회덕출신 안생의 손자이며 중림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김익생의 딸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올과로 급제, 1438년 삼각산 진관사에서 사가독서를 하였다. 1447년에 문과중시에 올과로 다시 급제하였다. 1453년(단종 1) 우승지를 거쳐 이듬해는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 뒤 1455년(세조 1)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음해에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세종 때 그는 신숙주, 최항, 유성원, 이개 하위지 등 당대의 유망한 젊은 학자들과 집현전의 관원이 되었다. 이들 학사들은 모두 그 시대의 이름높은 선비들이었으나 그 가운데서도 그는 경술과 문장, 필법이 뛰어나 집대성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그는 울분을 참지 못하여 경희루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하였으나 함께 후일을 도모하자는 성삼문의 만류로 단념하였는데 이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단종복위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그는 충청도관찰사로 나가있는 동안 세조에게 올리는 일체의 문서에는 신이라는 글자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이듬해 내직인 형조참판으로 다시 들어온 뒤 성삼문·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질 등과 함께 은밀히 단종복위운동을 추진하였다.

그해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을 모시고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만찬회를 창덕궁에서 열기로 하자 이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즉 왕의 호위역인 운검으로 성승· 유응부·박정을 세워 일제히 세조와 그 추종자들을 처치하고 그 자리에서 단종을 복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날 아침에 세조는 연회장소인 전내가 좁다는 이유로 갑자기 운검들의 시위를 폐지하였다. 이에 유응부 등은 거사를 그대로 밀고 나가려고 하였으나 대부분은 훗날을 기약하며 거사일을 미루자고 나가려고 하여 뒷날 관 가(곡식 씨를 뿌릴 때 왕이 친히 관람하면서 위로하는 권농의식) 때로 다시 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함께 모의하였던 김질이 세조에게 밀고하였으므로 성삼문 등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국문을 받았다.

이에 그는 이미 성삼문이 잡혀가 모의사실이 드러났음을 알고 떳떳하게 시인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자신에게 귀부하여 모의사실을 숨기기만 하면 살려줄 것이라고 은밀히 유시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지라 웃음만 지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라 하고 상감이라 부르지 않았다. 세조가 노하여 "그대가 나에게 이미 신이라고 칭하였는데도 지금 와서 비록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하자 그는 "나는 상왕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는 아니므로 상왕의 신하로 충청감사가 되었고 장계에도 한번도 신자를 쓴 일이 없고 녹도 먹지 않았다"고 대답하였다.

세조는 그가 충청감사로 있을 때 올린 장계를 실제로 살펴보니 과연 신자는 하나도 없었으며 모두 거 자로 쓰고 있었다. 물론 녹도 먹지 아니하고 한 창고에 봉하여 두었음을 알았다.
더욱 노기를 띠어 심한 고문을 가하면서 함께 모의한 자들을 대라고 하였다. 그는 서슴없이 성삼문·하위지·유성원·이개·김문기·성승·박정·유응부·권자신·송석동·윤성손·이휘와 자신의 아비 중림이라고 대답하였다. 세조가 육신에게 형을 가할 때 김질을 시켜서 술을 가지고 옥중에 가서 옛날 태종이 정몽주에게 부르던 노래를 읊어 시험하니 박팽년은 "가마귀 눈비맞아 희는듯 검노래라 야광명월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님향한 일편담심이야 변할줄이 있으랴"하고 대답하였다.

그는 심한 고문으로 그 달 7일에 옥중에서 죽었으며 다음날에는 다른 모의자들도 능지처사 당하였다.
그의 아버지도 능지처사되고 동생 대년과 아들 헌·순·분이 모두 처형되어 삼대가 참화를 입었다. 이와 함께 그의 어머니·처· 제수 등도 대역무도의 가족이라 하여 공신들의 노비로 끌려갔다.

사육신중 박팽년에만 후손을 남길 수가 있었으니 이는 둘째아들 순의 아내 이씨가 임신 중이었는데 조정에서 명하기를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고 하였다. 그때 종이 또 한 태중이었는데 주인은 아들을 낳고 종은 딸을 낳자 종의 기지로 서로 바꾸어 자식을 삼고 이름을 박비라 했다. 성장하여 성종 때 순의 동서 이극균의 권에 의해 숨어살기를 끝내고 자수하였다. 왕이 특히 용서하였으며 이름을 일산으로 고쳤다.

이 단종복위운동이 있을 때 나이가 어렸던 남효온이 성장한 뒤에 이 사건의 많은 피화자 중 충절과 인품이 뛰어난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등 여섯 사람을 골라 그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기니 이것이「추강집」의 사육신전이다. 그 뒤 사육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혀 왔으며 그들의 신원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 오다가 마침내 1691(숙종 17)에 이르러 이들의 관작이 회복되게 되었다.

그 뒤 1758(영조 34)에 다시 자헌대부의 품계를 받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1791년(정조 15)에 단종에 대한 충신들의 어정배식록에 올랐다. 삼대가 화를 입은 멸문으로 그에 대한 자세한 행장이나 문집 등이 오늘날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추강집」의 사육신전이나 다른 서에 간헐적인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는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과 문종의 깊은 총애를 받았을 뿐 아니라 경술과 문장, 필법에 뛰어난 존재로 집대성이라는 칭호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경국제세의 명문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되나 이와 같은 문집이 전하지 않고 있음을 심히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는 단종이 왕위를 잃게 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대의를 위하여 눈앞에 기약된 영화와 세조의 회유책을 감연히 거절 하고 죽음과 멸문의 길을 서슴없이 걸어왔으니 이와 같은 높은 절의는 오늘날까지 온 국민의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시호는 충정이며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묘역에 있다. 그의 묘에는 그저 박씨지묘 라고 새겨진 표석이 새겨져 있다. 그 이유에 대하여 허적은 "성삼문 등 육신이 죽은 뒤에 한 의사가 그들의 시신을 거둬 강남(노량진) 기슭에 묻었으며 그 무덤 앞에 돌을 세우되 감히 이름을 쓰지 못하고 그저 아무개 성의 묘라고만 새겨놓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문장과 필법에 뛰어났는데 특히 필법에 뛰어나 남북조시대의 종유와 왕희지에 버금간다 하였다. 이 묘역은 1978년 사육신공원으로 단장되었으며 장릉충신단에 배양되었다. 또한 영월 창절서원 등 여러 곳에 제향되었다. 충주시 신니면 신청리 94번지에는 지방기념물 제27호로 지정된 박팽년사우가 있다.

이전글 지네 많던 계명산
다음글 손승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