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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는 통일신라 초기의 유학자이자 대문장가로서 태종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3대에 걸친 문신으로 특히 외교문서에 능란하여 당시 복잡미묘한 국제관계에 문장으로써 공헌한바 컸던 인물이다.
초명은 자두이며 중원소경(지금의 충주) 사량 출신의 육두품으로 보이는 내마 석체의 아들이다. 어머니가 꿈에 머리에 뿔이 돗힌 사람을 보고 임신하였는데 그가 태어나자 머리뒤에 높은 뼈가 있었다. 이상히 여긴 아버지가 그를 데리고 현자를 찾아가 물어보니 뛰어난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자라면서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고 의리를 중히 여겼다. 아버지가 그의 뜻을 알아 보려고 "불도를 배우겠는가, 유도를 배우겠는가?"하고 물으니 강수는 "제가 듣기로는 불도를 세외교라고 합니다. 저는 속세의 사람이온데 어찌 불도를 배우겠습니까 유자의 도를 배우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뒤에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하여 학문이 뛰어나 당대의 걸출한 인물이 되었으며 벼슬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지냈다. 태종무열왕이 즉위하자 당나라의 사신이 가져온 국서에 알기 어려운 대목이 있어 임금이 그에게 물으니 해석과 설며에 막히는 곳이 없었다. 왕이 감탄하여 그 성명을 물으니 "신은 본래 임나가라(지금 고령일대) 사람으로 이름은 자두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왕이 그대의 두골을 보니 가히 강수선생이라 할만하다고 하였다. 또 당나라에 보내는 훌륭한 답서를 지으매 임금은 더욱 기특히 여겨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임생이라고만 하였다.
그 뒤 당나라와 고구려, 백제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전담하게 되어 당나라에 원군을 청하는 글을 짓기도 했다. 그 글 가운데 당시 당나라에 갇혀있는 김인문을 석방해 줄 것을 청한 청방인문표는 당나라 고종을 감동시켜 곧 김인문을 풀어 위로하여 돌려 보내게 하였다.
그리고 671년(문무왕 11) 당나라의 장수 설인귀에게 보내는 글도 지었다. 재물에 뜻을 두지않아 가난하게 지내자 태종무열왕은 유사에 명하여 해마다 신성의 창고에 있는 조 1백석을 하사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논공행상을 할 때 그는 외교문서로써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고 하여 사찬의 관등과 세조 2백석을 증봉 받았다. 그가 죽자 왕은 후하게 장사를 지내주고 많은 물품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집안의 사람들이 사사로이 가지지않고 모두 불사에 보내주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생활이 곤란하여 향리로 돌아가려고 하자 대신이 듣고 왕에게 청하여 조 1백석을 주게 하였으나 받지않고 향리로 돌아가 버렸다.
그가 당시에 유행하던 불교를 세외교라 하여 버리고 사회적으로 그 힘이 미약한 유학에 뜻을 둔 것은 개인의 착상이라기 보다는 진골 중심의 골품제 사회에서 육두품 이하의 귀족으로 편입된 그의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커간 것이며 또 크게는 대가야가 멸망하면서 가야의 귀족들을 사민정책에 의하여 강제로 이주시킨 중원경의 문화적 분위기에서 영향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가 공부한 학과목은 효경, 곡례, 이아, 문선으로 주로 유교적인 실천도덕과 아울러 문자와 문학에 관한 것에 비중을 두었다. 이리하여 유학자로서 보다 문장가로서 유명하게 되었다.
청년시절에는 자기보다 신분이 천한 부고의 대장장이의 딸과 정을 통하고 있었다. 그가 20세가 되었을 때 부모가 "너는 지금 명성이 있어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미천한 자를 짝으로 삼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새로 읍 중의 인물로 아름답고 행실이 좋은 여자에게 장가 들어라"고 하였지만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바가 아니지만 도를 배우고 행하지 않는 것이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하여 거절하였다.
이렇게 신분이 낮은 부인을 택한 것은 새로운 윤리관의 제시이며 신라의 전통적인 윤리에 대한 비판적 태도라 할 것이다. 또 나아가 골품제에 입각한 신라의 신분제에 대한 비판의 성격을 띤 것이기도 하다. 이로써 그는 신라사회의 육두품 이하의 신분으로 유학, 문장학을 가지고 진출한 지식층이며 또 신흥의 유교관료적 성격을 가졌던 사람으로 현존하는 기록상 최초의 본격적인 유교적 문인으로 사회사적, 사상사적 의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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