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견의 발생 |
투기(투기)는 인간의 보호 본능에서 저절로 발생한 기예다. 인류가 발생하여 집단생활을 하게 되면서 적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신변 보호를 위하여 거의 본능적으로 움직인 것이 그 발생의 근원이다.
30만년 전부터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집단 생활을 하면서 구석기 문화를 창조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택견의 원시적 형태는 생겨 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의 택견의 품밟기를 보아도 그 능청거리며 굼실굼실 우쭉우쭉대는 곡선의 몸짓이 적에 대한 자연 발생적 보호 본능에서 출발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쉽게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고대 국가에서 영고(迎鼓), 동맹(東盟), 무천(舞天)과 같은 제천의식(祭天儀式:하늘에 제사지내는 의식)이 있었다. 이때 가무(歌舞)를 즐겼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춤이 택견 곧 그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 유사점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지금 우리가 보는 택견의 품세가 춤사위의 벌림과 디딤, 사선 진입, 유연한 동작 등 여러 면에서 춤과 유사점이 많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택견의 발생과 그 발달은 아득한 옛날 순전히 우리민족 자생적인 것이며 오랜 전통을 가지고 발전되어 면면이 내려 왔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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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견의 개요 |
고구려의 선배 |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는 선배(선비)제도가 고구려의 강성을 이룩했다고 주장하고 선배를 뽑는 경기 중에 수박과 덕견이가 들어 있다고 했다. 손으로 하는 기술과 발로 하는 기술이 구별되어 있음과 동궤다. 택견<결련>에서 볼 수 있는 동작은 이 둘을 합친 기예며 기술이란 손기술인 수박과 발기술인 덕견을 말한다. 무예는 역시 고구려가 본산임이 사실이다. 이러한 증거는 고구려의 서울이었던 환도성에 있는 고분, 각저총, 삼실총, 무용총의 벽화가 오늘날 택견의 자유 견주기나 기타 품세와 흡사하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고분의 그림을 통하여 이미 고구려 시대에 택견의 품이 어느 정도 완성된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으며, 단순히 자기 몸을 방어하는 소극적 자세에서 일보 전진하여 공격의 투기로 변모해 갔음도 알 수 있다. 신체를 단련하여 적군을 무찌를 수 있는 비상시의 무술로 여겨졌으리라고도 짐작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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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수박 |
백제는 지리적 이점을 살려,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이를 꽃피워서 일본에 전하므로써 그들과 교류가 빈번했던 것이다. 왕을 비롯한 귀족층이 고구려 사람들이었다고 본다면 고구려의 풍속이 백제에 그대로 전해 진 것은 문헌을 통해 살피지 않더라도 자연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선배제도의 수박(手搏)도 백제에서 시행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문화는 고구려나 신라보다 앞섰던 것으로 보이며, 계백과 신충 같은 장군의 출현을 생각하면 무술도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모두 고구려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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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화랑 |
신라는 고구려의 선배제도를 모방하여 화랑제도를 크게 발전시켰는데, 화랑들이 수련했던 무예가 고구려의 그것과 같았다고 하며, 그 종목 중에 수박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신라가 통일을 위해 국력을 키우면서 무사들의 무예수련에 얼마나 큰 비중을 두었는가를 볼 수 있다. 결국 삼국에서는 한결같이 국가의 정책에 의해 무예가 크게 장려되었으며 이 무예가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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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수박 |
고려 시대에 수박이 매우 발달되고 널리 퍼져 시행되었으며, 수박 기술이 뛰어나 벼슬도 얻고 지위도 높아졌던 것이다. 수박의 기예도 매우 발달하여 맨주먹으로 기둥을 쳐서 서까래를 움직이게 한다거나, 벽을 쳐서 주먹이 벽을 뚫고 나감은 물론 급소처치 기술조차 발달하여 고도의 기예술을 드날렸다. 단체 대련의 실시도 있었던 듯싶은 기록도 보인다. 이런 모든 기술은 송도 수박으로 조선조에 이어졌다. 고려 시대의 문헌에는 발기술을 주로 하는 택견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손기술을 위주로 한 수박에 대한 기록만 다수 보일 뿐이다. 수박이 손기술을 주로 한다지만 발의 동작도 따라서 일정한 품세로 수박에 맞게 발달되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다만 손기술이 더 발달되었다고 볼 수 있을 뿐이지, 전혀 발기술은 사용하지도 않았다고 하기는 어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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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택견 |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을 받아 무예가 천시되었으나, 그래도 수박이 제도적으로 병사를 뽑는 정규시험과목에 들어있어서 주로 3인 이상을 이긴 사람을 군사로 뽑아 썼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수박을 수련해 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줄곧 수박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되어오던 무예가 택견이란 이름으로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조 22대 왕인 정조(1777∼1800)때의 일이다. <재물보> 또는 <만물보>라고 하는 이 책은 우리나라 역대의 제도와 문물을 상세히 기록해 놓은 오늘날의 백과사전에 해당하는 책인데, 이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卞手搏爲卞 角力爲武 苦今之 탁견." 이를 풀이하면 '변 수박은 변이라 하고 각력은 무라 한다. 지금에는 이것을 탁견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수박이라는 무예가 지금의 택견과 같은 무예라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택견의 유래를 적어도 삼국시대로 볼 수 있게 되었으며 고대에 이미 체계화되고 보편화되어 있던 택견이 바로 우리 민족의 전통무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후기의 자료를 살펴보면 지방의 평민이나 천인들 조차 택견을 열심히 연마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 심지어는 어린아이들까지도 무사들의 택견을 흉내내며 놀았을 정도였다. 1846년에 유숙이 그린 <대쾌도(大快圖)>를 보면 몇몇 사람이 많은 군중에 둘러싸여 씨름과 택견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사진으로 본 백년 전의 한국>에서는 구한말의 어린이들이 택견을 하고 있는 모습을 실제사진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조선시대에 우리 조상들이 택견을 무예로서 뿐 아니라 풍류로서도 즐겼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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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말살 |
1910년 조선을 강점한 일본은 우리 고유의 것은 모조리 찾아 말살시키려고 하였다. 민속놀이의 말살과 더불어 우리고유의 기예인 택견도 금지의 슬픈 운명을 맞았다. 택견을 아주 못하게 직접 금지시킴은 물론 일경은 택견꾼을 보는 대로 잡아갔다. 일본 사람들은 과거에 그들이 배워간 것을 그들식으로 카라떼를 만들어 보급하여 우리 택견의 기술과 혼돈시켰다. 윗대 택견의 송덕기선생은 택견 시합을 일제 시대부터 못하게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비밀리에 사범들에 의해 전승되어 명맥은 끊기지 않았으니 이것이 우리 민족의 끈질긴 장점이 아닐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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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택견 |
광복이 되자 신한승 선생은 그동안 탄압을 받아 사라져가던 택견의 정리와 체계화에 몰두하게 된다. 선생은 어렸을 때 자신의 종조부인 신재영 선생으로부터 택견을 배운 경험이 있는 관계로 이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는 데는 아주 적격이었다. 결국 김홍식, 송덕기, 이경천 선생 같은 택견의 명인들을 찾아내어 그들 모두로부터 택견을 전수받았고, 이를 정리하고 체계화하여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로 등록시켰다. 이 과정에서 선생이 당하신 고난은 이루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부유하던 집안은 몰락하였고, 친구들마저도 미친 늙은이라 손가락질하며 떠나갔다. 그러나 택견의 원형을 후세에 남겨주는 것만이 자신이 부여받은 사명이라 믿은 선생은 온갖 고초를 이겨내고 결국 대업을 이루었다. 지금은 87년 7월에 돌아가신 선생의 뒤를 이어 당신의 수제자이신 정경화 선생님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동안 활발한 활동을 벌인 결과 이제는 범국민적인 관심 속에 점차로 예전의 인기를 되찾고 있으며, 우리 것을 널리 보급하려는 의식 있는 이들의 노력에 의해 생활무예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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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택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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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아주 오래된 옛날부터 만주와 한반도에는 맨손무예로 실력을 겨루는 경기가 있었다. 본래는 특정한 이름이 없이 널리 행해졌는데, 이를 글로 표현하려 하니 마땅한 말이 없어서 그저 '맨손무예놀이(또는 경기)'라는 뜻의 수박희(수박희)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던 것이 조선 중엽에 명나라로부터 권법과 무기술이 들어오게 되자, 우리 고유의 맨손무예와 명나라의 권법을 구분하기 위해 새로운 명칭이 필요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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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새로 사용하게 된 말이 탁견 혹은 택견이란 것이고 이를 즐기는 마당을 택견판, 또는 택견마당이라고 하게 되었다. 그럼, 택견판을 어떻게 벌였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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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택견판에서는 웃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뉘어 경기가 진행되었다. 서울의 경우, 성 안에 이들 마을을 '웃대', 성 밖을 '아랫대'라고 하였으며, 성 안에서도 대궐에서 가까운 쪽 마을을 '웃대', 먼 쪽을 '아랫대'라고 하였다. 웃대와 아랫대의 마을사람들이 택견판을 치루기로 약속한 장소로 모여든다. 마당엔 멍석을 두어장에서 서너장 정도를 깔고, 구경꾼들이 빙 둘러선다.
먼저 마을의 풍물패가 마당을 돌며 택견판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아무도 다치는 사람 없이 택견판이 잘 끝나게 되기를 기원한다. 이어서 각 마을에서 뽑힌 선수들이 구경꾼들보다 조금 앞으로 나와 앉아 경기를 주시한다. 먼저 한 쪽 마을 선수가 나와서 원품으로 서서 "서거라"하고 외친다. 다른 쪽 마을에서도 선수가 나와서 적당한 위치에 좌품으로 서서 "섰다"하고 외친다. 이때 "서거라"하고 외쳤던 선수가 다가와 상대와 한 걸음 정도의 거리에서 마찬가지로 좌품을 취한 후, 둘이 동시에 "익크!" 하는 소리를 내며 경기가 시작된다. 택견판의 경기방식은 연승제이다.연승제란, 이긴 사람은 계속 남아서 새로운 상대와 맞서 싸우는 것을 말한다. 물론 진 사람은 판에서 물러나야 하며, 한번 진 사람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다시 참가하지 못한다. 승패를 판정하는 방식은 상대를 발로 걸거나 차서 넘어뜨리는 것으로 한다. 손도 사용할 수 있어서 차 온 발을 잡거나 몸통을 밀어낼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옷을 잡아당겨 찢으면 지는 것으로 한다. 그리고 발로 상대의 얼굴을 차도 이기게 된다. 택견판에서는 심판을 찾아볼 수 없다.
모든 구경꾼들이 다 심판이고 관객이다. 간혹 승부를 가리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할 경우엔 양쪽 마을의 원로들이 합의하여 승부를 결정짓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택견판에선 구경꾼들이 자기 마을 선수들을 응원하면서도 정정당당하게 이기도록 격려하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단, 택견에서 지켜야 할 가장 큰 원칙인 '상대에 대한 배려'를 무시한 채 의도적으로 상대의 급소를 공격하여 다치게 하면, 택견판은 무산되고 목숨을 건 혈투의 약속을 하게 된다. 그로부터 며칠 후엔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결련택견판(요즘 말로 하면, 패싸움)'을 벌이게 되는데, 이때 몇 명은 크게 다치고, 간혹 죽어나가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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