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끝난 이맘때면 중3 엄마는 바빠진다. 기말고사 치른 11월부터 내년 2월까지의 넉 달이 고등학교 3년 농사의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이 '중대한' 사실을 며칠 전에야 알았다. 중3 아이 두고도 천하태평인 직장 맘이 딱했는지 이웃해 사는 여자가 동네 수퍼에서 붙들어 세웠다. IT 기업 다니다 큰애 중학교 가면서 집에 들어앉은 그녀는 알짜 진학 정보에 밝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가 일러준 '예비 고1 엄마의 행동수칙'은 이랬다. 첫째, 국어에 집중할 것. 대학 당락은 (누구나 열심히 하는) 수학·영어가 아니라 중학국어와는 차원이 다른 고등국어에 달렸단다. 지문이 교과서 밖에서 나오는 데다 철학에서 물리를 망라하니 어지간한 독해 실력으론 어림없단다. 둘째, 내 아이 다닐 고등학교 시험 유형에 정통한 학원과 강사를 찾을 것. 대형 학원 유명 강사라고 '장땡'이 아니니 발품을 들이란 얘기다. 셋째는 '수학 정석' 떼기다. "첫 중간고사부터 전쟁인 거 알죠? 내신 1·2등급 가르는 그 한 문제를 풀려고 1000만원짜리 과외도 불사하는데, 기본은 하고 가야지요." 그게 끝이 아니다. 2000가지 넘는 대학 입시 전형을 숙지할 것. "그래야 아이에게 맞는 입시 전략을 짜죠. 고등 3년은 엄마 아이가 한 몸이 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해요."
◀고등학교 참고서를 사러 서점으로 가는 발길이 무겁고 심란했다. 그녀 말이 사실이라면 생계형 맞벌이나 한 부모 가정의 자녀는 뛰어난 두뇌와 성실성을 타고나지 않는 한 좋은 대학에 갈 수 없다. 사다리가 돼야 할 교육 현장에서 금수저, 흙수저가 갈리는 셈이다. 여성 경제활동 참여율 높이는 일도 요원하다. 자녀 성적이 곧 엄마 성적이니 야근이 손에 잡힐 리 없다.
◀전쟁터 나가듯 입시를 준비하게 만든 건 교육 당국이다. 공교육이 얼마나 부실한지는 교과서만 펼쳐봐도 안다. 한국사뿐 아니라 과학·사회가 다 그렇다. 비문(非文)이 즐비하고 엉성하기 짝이 없다. "교과서로만 공부했다"는 수재들 말은 대개 거짓이다. 교수법 후진 것도 30년 전이나 매한가지다. '응답하라 1988'에서 서울대 간 언니가 외치듯 수학부터 음악까지 "이해하려 들지 말고 무조건 외워, 이 바보들아!"가 우리 교육 방식이다. 그때는 달달 외운 게 시험에 나오기라도 했다. 요즘은 대학교수도 쩔쩔맬 만큼 해괴한 문제를 낸다. 꼬고 또 꼰 그 한 문제를 맞히려고 학부모와 사교육 시장이 움직인다. 공교육과 사교육 사이 커넥션이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서점에 깔린 대입 수능 국어 기출문제집을 펼쳤다. 이웃집 여자가 옳았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쉬운 편에 속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가 이어졌다. 책깨나 읽은 어른도 단박에 풀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플라톤을 읽어야 하는 이유, 지문 끝까지 안 읽고도 정답 찾는 법을 알려주는 고액 강사가 성행하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이 정도면 불치병에 가까운 중증인데, 진통제만 쓴다. 대수술이 필요한데 누구도 메스를 들지 않는다.
<2015년 11월 25일자 ‘트렌드 돋보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