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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동네 사랑체험 소감문 우수작
작성자 충주여중 등록일 10.07.25 조회수 378

배우다, 사랑 · 사랑하는 법.
3학년 4반 13번 송연경

2007년 03월 15일 목요일 꽃동네 도착.
많은 것을 배웠다. 사실 도착해서 봉사활동을 시작하기 전 까지는, 할아버지.할머니 분들을 직접 뵈고 도와드릴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유감스럽게도 내게 주어진 활동은 주방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실 봉사활동 보다는, 여러 강의들이나 공동체 놀이, 노숙자 체험, 장애 체험 등에서 더 많은 것을 알고, 배웠다. ‘백문이 불여일견’ 이라는 말을 절실하게 깨닫기도 했다.
첫날에 했던 장애 체험 때에는 나, 우리에게 세 가지의 장애가 주어졌다. 시각.청각.언어 장애. 다 들리면서 들리지 않는다고 자신에게 암시를 거는 것이 과연 청각장애를 이해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 지 의문이었지만 정작 해보니 많이 불편했고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 또한 하고 싶은 말, 그리고 꼭 해야만 하는 말, 심지어 헛기침까지 하지 못하는 불편함이 어떤 것인지 잘 알게 되었다. 어렴풋이 상상만 해보곤 했던 것들을 실제로 겪자 순간적으로 장애인들을 조금이나마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만 같았다. 시각.청각.언어 장애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역시 시각장애였다. 사람의 다섯 감각 중 고작 하나를 잃은 것이, 1/5의 두려움이 아니라 정말 커다란 두려움이었다는 것. 너무 절절히 알게 되어 슬펐다.
둘째 날 아침, 두 번째로 인상이 깊게 남았던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노숙자 체험이었다. 딱히 부인 할 것도 없이 나는 정말로 노숙자들에게 대단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상태로 있는 것이며, 몹시 게으르고 사람들에게 동정 받는 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이라는 그런 편견들. 반 지하 방으로 가기 이전에 영상실에서 프레젠테이션과 함께 들었던 수녀님의 말, 그 말들은 나의 노숙자에 대한 인식을 거의 정반대로 바꾸어 놓았다. 반 지하 방으로 가서-비록 물품부족으로 옷은 받지 못했지만- 박스를 깔고 신문지를 덮으며 그 추운 곳에서 자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알게 되었다. 강의에서 들었던 노숙자들의 무력감이라던가, 가족들에 대한 기억들이라는 것을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기 때문에 더욱 이해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다음, 선택 프로그램인 새로운 탄생이 있었다. 이 때에 다른 아이들은 많이 울었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덤덤한 척을 했지만 허탈감과 두려움, 막막함 등 생각이 복잡하게 얽혀 힘들었다. 처음 유서를 쓸 때만 해도 억지로 꾸민 진지함이었는데 관 속으로 들어가 관이 닫히고, 못질 하는 소리가 들리자 정말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가장 울컥 했던 것은 나와 함께 웃고 있던 가족들의 모습에서, 자연스레 내가 사라지는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었다. 딱 그 생각을 했을 때가 가장 목이 메여왔던 순간이었다. 관에서 나와 영정사진 앞에 앉았을 때. 죽는다, 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생각이 머리를 뒤덮어 잠시 멍해졌던 것도 같다. 유서에 썼던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 그 내용들은 앞으로 내가 해야 할 것을 알려 준다.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를 가지자. 부모님의 은혜를 다 갚지 못했다고 서글퍼하지 않도록, 동생에게 잘해주지 못했다고 후회하지 않도록, 이루고 싶었던 꿈을 다 이루지 못했다고 미련 남지 않도록.

훈훈한 교훈이 나를 뒤덮었던 시간들이 있었다면, 나를 굉장히 즐겁게 하고 흥분한 상태로 만든 시간들도 있었다. 그 시간은 당연-히 레크레이션. 1부 때, 선택 프로그램이 새로운 탄생이었던 나는 단순 관람만 했었지만 수화나 아카펠라, 레크댄스등을 하는 애들을 보면서 꽤나 많이 웃고 응원도 하고 했다. 선생님들이 나오셨을 때는 정말, 작년 축제 때 여선생님+정식샘이 나오셨을 때 만큼이나 많이 웃었었고. 1부가 끝나자 목소리가 이상해졌을 정도로 텐션이 높았다.
그리고 2부가 시작 되었다. 각 반 아이들이 동그랗게 모인 후에 두 명씩 짝을 짓고 게임을 했다. 약 7번 정도를 가위바위보를 했었는데, 운이 좋았던건지 어쨌는지 무려 7승 무패의 쾌거를 이뤄내기도 했다. –힘으로 밀어내기 했을 때는 졌다- 그렇게 웃고, 게임하고, 진 사람이 벌칙 받는 것을 즐기고 했는데,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겼다. 다시 아이들을 원 모양으로 모아놓고 댄스타임-이라고 사회자 선생님이 외치셨을 때 까지도 나는 어리석게도 잊고 있었다. 주로 이런 댄스타임 때 가장 먼저 나오게 되는 것은 실장이라는 것을. 사회자 선생님이 ‘실장 일어나세요-’했을 때야 겨우 위기를 느낀 나는 어떻게든 이 위기를 모면해보고자 했으나 수가 없었다. 춤을 춰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나는 끝까지 춤을 추지 않겠다고 결심했었지만……애들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수줍은 실력을 내보이고야 말았다. 어쩌면 민폐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든다, 지금은. 7반의 재희나 2반의 빛나는 꽤나 잘 추고 있었고 다른 반 실장들-승실이나 현지-은 보이지를 않아서 당황하던 나는 그 자리에서 그야말로 허접한 실력으로 턴을 했고, 끝에 가서는 머리를 마치 –백승실의 말을 인용하자면-미친 사람처럼 흔들어댔다. 그 당시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짧지만 길었던 15초가 지나고 나서 밀려오는 창피함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고, 나는 한 이틀 동안 그 기억에 시달렸다. 그러저러해서 겨우 레크레이션 시간이 끝났다.

약간 과장을 해서, 위해서 말했던 교훈과는 또 다른 교훈을 얻은 때도 있었다. 바로 밤이었다. 나는 어쩌다보니 실장, 방장, 조장을 전부 맡게 되어 할머니 겸 어머니가 되는 난감한 상황을 겪었다. 세 가지 장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방장이었다. 실장으로서 애들의 인원체크를 하는 것, 조장으로서 노란 카드에 점수를 받아 오는 것. 그것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방장으로서의 내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내 팔과 다리는 아직도 피로에서 풀려나지 않았다.
밤이 되어, 여느 수련회나 수학여행에서 그러하듯이 점호가 시작되었다. 첫날에는 멋모르고 지도교사 분들이 오면 그때 적당히 하면 되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11시가 되도록 애들과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그러나 지도교사분의 엄격함과, 어떤 한 아이의 맹랑한 장난 때문에 방장들은 전부 엎드려뻗쳐를 해야만 했다. 그날 밤, 애들을 정리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뼈저리게 느낀 나는 둘째 날에 애들을 세 명씩 앉혀놓고 조용히 시키는 둥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전 날보다 더 엄격한 지도교사분이 들어오셔서 갑자기 기합을 주시는 바람에 내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 약 이삼십 분 가량 엎드려뻗쳐를 한 나는, 다음부터는 절대로 방장 같은 건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감동적이고, 교훈적이고, 즐겁고, 힘들기도 했던 2박 3일이었다.
하나의 경험도 충분히 한 사람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내게 있어 꽃동네의 경험이 그렇다. 이전의 태도를 반성하고 미래에 성실하자. 힘내자.
2007년 03월 17일 꽃동네 떠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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