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의 책 |
|||||
---|---|---|---|---|---|
작성자 | 주재석 | 등록일 | 25.09.04 | 조회수 | 4 |
첨부파일 |
|
||||
정원의 책
괴테에서 톨킨까지, 26편의 문학이 그린 세상의 정원들
황주영 저 | 한겨레출판 | 2025년 06월 26일
목차
프롤로그 ? 가든 라이팅으로 만든 꽃다발
1. 치유의 정원
· 하지만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합니다: 볼테르,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 마법이 정원에 있네: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 《비밀의 정원》 · 19세기 리틀 포레스트: 귀스타브 플로베르, 《부바르와 페퀴셰》 · 사생활인데 무슨 상관입니까?: 찰스 디킨스, 《위대한 유산》 · 취약하고 즐겁게, 인간답게: 조반니 보카치오, 《데카메론》 · 센트럴파크를 만든 여행: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 《미국 농부의 영국 도보여행과 이야기》
2. 사랑의 정원
· 언젠가 본 적 있는 정원: 조르조 바사니, 《핀치콘티니가의 정원》 · 인내와 시간이 만든 자연미: 장 자크 루소, 《신엘로이즈》 · 네 사람의 어긋난 케미스트리: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친화력》 · 그 정원은 한낱 꿈이었지만: 프란체스코 콜론나(추정), 《힙네로토마키아 폴리필리》 · 죽음으로도 죽지 않는 사랑: 크리스티앙 보뱅, 《그리움의 정원에서》 · 스위트 캔디, 근대의 향기: 이가라시 유미코, 《캔디 캔디》 · 사랑엔 결코 지나침이 없음을: 파스칼 키냐르,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3. 욕망의 정원
· 투기판 속 신흥 부자들의 정원: 에밀 졸라, 《쟁탈전》 · 왕자님, 너무 감상적이에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감상주의의 승리》 · 여름이었다: 에벌린 워, 《다시 찾은 브라이즈헤드》 ·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의 정원: 도미니크 비방 드농, 《내일은 없다》 · 왕의 산책을 따라가기: 루이 14세, 《베르사유 정원을 보여주는 법》 · 정원에도 윤리가 있다면: 마틴 에이미스, 《존 오브 인터레스트》 · 앎으로 삶을 풍요롭게: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 《자연사》
4. 생태의 정원
· 인류 최초의 환경파괴범: 《길가메시 서사시》 · 도토리 100개를 매일 심는 마음: 장 지오노, 《나무를 심은 사람》 · 일어나세요, 비 공주님: 테오도어 슈토름, 〈레겐트루데〉 · 나무수염이 전하는 이야기: J. R. R. 톨킨, 《반지의 제왕》 · 최초의, 최후의, 다시 최초의 아담과 이브: 마거릿 애트우드, ‘미친 아담 3부작’ · 지구 정원사는 떠나지 않는다: 김초엽, 《지구 끝의 온실》
미주
책소개
우리는 최초의 인류가 ‘정원’에 살았던 것을 안다. 서구 문명에서 에덴(Garden of Eden)은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충족된 공간, 낙원의 원형이다. 그곳에서 ‘추방’된 이후 인간은 줄곧 잃어버린 장소를 그리워하며 시대와 지역, 문화에 따른 이상향의 모습을 각자의 정원에 담아왔다. 황주영의 첫 저서 《정원의 책》은 그러한 정원에 반영되어온 인간의 다양한 욕망을 26편의 문학 작품을 통해 펼쳐 보인다. 문학과 미술사, 조경학을 전공한 저자는 인류 최초의 문학으로 전해지는 기원전 24세기 무렵의 《길가메시 서사시》부터 2025년 현재 한국에서 뜨겁게 사랑받는 소설가 김초엽까지, 시간과 공간과 장르를 넘나드는 문학 작품들을 정원이라는 키워드로 엮었다. 그 사이에 볼테르, 루소, 괴테, 찰스 디킨스, 귀스타브 플로베르, 에밀 졸라, 톨킨, 마거릿 애트우드, 파스칼 키냐르 등 거장으로 칭송되거나 문학적으로 중요한 작가들이 저마다 고유하게 그려낸 정원을 하나씩 소개한다. 정원들은 배경이기도 하고 주제이기도 하며 때로는 그 자체로 주인공이다. 그리고 소설 속 인물들은 인류가 문명이 시작한 이래 쭉 그랬듯 깊은 사랑과 치유, 간절한 꿈과 미래, 오랜 그리움과 기다림을 정원에 심는다.
반려식물을 비롯해 숲이나 공원 등 자연으로부터 조성된 푸른 공간과 대상에 관심이 높아지는 요즘, 천천히 글자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정원에 입장한 듯 오감이 깨어나는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또한 알던 작품도 정원을 렌즈로 다시 읽는 재미, 정원이 서사의 중심이 되거나 강력한 은유가 되는 새로운 작품들을 소개받는 즐거움을 동시에 주는 책이다. 더욱 깊이 읽는 독자라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스쳐가고 소비되는 시대에도 ‘정원’과 ‘문학’처럼 시간을 들여 살피고 돌보아야 하는 것이 여전히 있음을 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정원은 잔잔한 시 같고, 또 어떤 정원은 후속편이 기대되는 연재 소설 같고 (…) 정원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읽고, 보이지 않는 행간을 헤아려 비평하는 일은 예술 작품을 이해해나가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때로는 덧없고 무용한 아름다움, 사라지고 되살아나는 과정에 경탄하는 것까지도.” _프롤로그 중
책 속으로
성에 살던 시기의 캉디드는 해맑고, 스승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했다. 그리고 모든 일을 겪고 난 뒤에도 그는 여전히 해맑다. (…) 수많은 가능한 세상 가운데 가장 좋은 세상은 권력이나 신분, 돈, 공허한 담론으로 만들 수 없고,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는 정원을 가꾸듯 차근차근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세상이 더 이상 낙관적이지 않을 때에도 정원처럼 가꾸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는 바람이기도 하다. --- p.24
열 살의 메리는 자기처럼 10년간 “아무도 원하지 않고 아무도 돌보지 않고 아무도 들어가지 않은” 정원에 호기심을 넘어 강렬한 동질감을 느낀다. 메리에게 비밀의 정원을 들여다보고, 죽은 풀과 잡초를 제거하고, 새싹을 심으며 돌보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돌보는 일이었다. 정원을 발견하고, 심지어 이를 훔치면서까지 정원을 가꾸려 하는 것은 남들 몰래 홀로 가두어진 채 죽어가는 정원을 내버려둘 수 없기 때문이다. --- p.29~30
잘 가꾸어지지 않은 정원은 불안정한 내면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1861)에 등장하는 미스 해비셤의 새티스 하우스의 정원이 대표적이다. 그녀의 삶은 신랑이 사라져버린 결혼식 당일에 멈추었다. 그날 이래 해비셤은 수십 년 동안 같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고, 저택의 모든 것은 퇴색되고, 연회장 식탁 위 썩은 웨딩 케이크처럼 천천히 부식되어간다. --- p.42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에서 즐거운 때를 보내던 계절은 “유리같이 투명하고 눈부신 날씨가 마법에 걸린 듯 정지된” 가을이었다. 하지만 눈부신 가을은 지나가고 정원을 떠나 집단수용소로 끌려간 이들에게는 죽음의 겨울이 온다. 이들이 떠난 후 정원의 나무들도 전쟁 막바지에 베여 땔감으로 쓰이고, “그 자체로 희귀하고 예외적인 무언가를 드러내던” 정원은 생기 없는 빈터가 되었다. 오로지 조르조만이 과거의 영화를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 p.78
이러한 괴테의 자연에 대한 감각은 일생 동안 그의 작품을 관통하고, 말년의 작품인 《친화력》에서 더욱 정교하게 나타난다. (…) 작가도 젊고 주인공도 풋풋하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의 표현을 보면 감정은 유난히 고양되어 있고, 풍경을 표현하는 문장에도 형용사가 많다. 작가도 원숙하고 주인공도 중년에 접어든 《친화력》에서는 풍경이 상당히 객관적으로 기술되고, 또 형용사도 잘 쓰이지 않는다. --- p.94
보뱅은 이 글을 내일이면 라일락과 벚꽃이 축제를 벌일 봄의 문턱에 썼다. 하지만 그에게는 “단 한 번의 봄이 일생의 모든 봄”이었고, ‘그리움의 정원’은 지슬렌이 세상을 떠난 여름 이후의 가을과 겨울의 정원이다. (…) 예전에는 붉은 장미가 피었지만 이제는 고통에 휩싸인 검은 나무에 불과한 장미나무가 흰 눈에 뒤덮인 정원. 하지만 나무들이 지슬렌의 웃음을 조금은 모아두었기에 영원을 사는 정원. --- p.109
그들에게는 정원 산책이라는 여가 활동도 중요한 정치적 활동이었다. 언제 누구와 어느 정원에 갔는지가 중요하다. 정원에서는 보는 눈, 듣는 귀가 많은 궁정에서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오갔고, 밀회를 하기도 했다. (…) 그런데 루이 14세는 이런 공간 통제로는 성에 안 찼는지 베르사유 정원 산책 경로를 안내하는 안내서를 직접 집필했다. --- p.174
정원에 선악이라는 윤리적 잣대를 댈 수 있을까? 오스카 와일드의 우화 《저만 알던 거인》 속 거인처럼 담장을 쌓고 이웃의 출입을 막은 정원은 악한가? 특정 식물에 알레르기가 있는 이웃을 괴롭히기 위해 일부러 그 식물을 심은 정원은? 유독 식물을 키우는 정원은? 몰래 훔쳐온 식물을 키우는 정원은? 노예를 부려 만든 정원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지만 멋지고 아름다운 정원은 좋은 정원일까, 나쁜 정원일까? --- p.180
“그대들이 먹을 양식을 불이 먹을지어다. 그대들이 마실 물을 불이 삼킬지어다”라는 엔릴의 저주는 길가메시가 아니라 그의 먼 후손 대에 이루어졌다. (…) 길가메시 이후 수많은 이들이 성스러운 힘을 잃은 삼나무 산의 나무를 베었을 테고, 이로 인한 자연환경의 파괴가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시작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쇠락한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길가메시와 엔키두가 후와와의 시신을 신들 앞에 놓았을 때, 엔릴이 꺼낸 첫마디는 “왜 이런 일을 했는가?”였다. --- p.203
저 : 황주영
이화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미술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파리 라빌레트 국립건축학교에서 박사후연수를 했다. 문화사적 관점에서 정원과 공원, 도시를 보는 일에 관심이 많으며 이와 관련된 강의와 집필, 번역을 한다. 논문으로 「핀레이의 〈리틀 스파르타〉 정원에 나타난 문학과 회화의 에크프라시스」, 「ut pictura hortus: 18세기 영국 풍경식 정원에 관한 연구」, 「이론과 실천의 대화: 정원이론서를 통해 본 프랑스 형식주의 정원의 발달」 등, 공역서로 『정원을 말하다』(로버트 포그 해리슨, 나무도시), 『도시침술』(자이미 레르네르, 푸른숲) 등이 있다. |
이전글 | 마침내 특이점이 시작된다 |
---|---|
다음글 | 운동화 뒤축에 달린 고리 ‘그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