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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명교실 게시판입니다.
발굴과 발견
작성자 주재석 등록일 25.05.09 조회수 1

 

 

 

발굴과 발견

 

우리 역사·문화를 새로 밝힌 유물과 유적들

도재기 저 | 눌와 | 2025년 02월 07일


목차

들어가며

1부. 발굴, 한국사를 새로 쓰다

찬란한 황금빛, 여전한 미스터리 | 신라 금관
더없는 보물, 부실한 발굴·복원 | 백제 무령왕릉
고구려인이 그려놓은 생생한 타임캡슐 | 고구려 고분벽화
바닷속 ‘보물선’을 찾아서 | 고선박과 수중고고학
사상·미감·기술의 융합, 공예품의 본보기 | 백제금동대향로
한반도를 지나던 ‘유리 로드 | 천마총 유리잔
산 자들이 준비한 마지막 선물 |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
유골, 새 차원의 ‘유물’로 거듭나다 | 고인골
AI시대에도 보존할 수 없는 오색 빛깔 | 비단벌레 장식
한국 고고학계의 ‘아픈 손가락’ | 풍납토성
마침내 찾아낸 신라의 회화 | 천마도
오늘도 발굴 중인 천 년 왕궁터 | 경주 월성
구리와 쇠, 역사·문화를 기록하다 | 금속활자
처음 만나는 신라 공주의 무덤 | 쪽샘 44호분
남과 북이 함께 발굴해야 할 그곳 | 태봉국 철원성(궁예도성)

2부. 발견, 한국사를 다시 보다

바위에서 찾아낸 선사시대 사람들의 소망 | 반구대 암각화
동호회가 발견한 국내 유일 고구려 석비 | 충주 고구려비
수백 년간 잊혔던 청정한 아름다움 | 고려불화
돌에 새겨진 치열한 삼국시대사 |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1만 유물 내놓은 국내 최고·최대 석탑 | 미륵사지 석탑
‘하사’냐 ‘헌상’이냐, 한일 고대사 논쟁 | 칠지도 명문
상상력 자극하는 2천 년 전 어느 날 풍경 | 농경무늬 청동기
심금을 울리는 소리의 비밀 | 성덕대왕신종
컬렉터의 역할과 품격 | 훈민정음 해례본
새롭게 ‘발견’해 내는 큐레이팅의 힘 | 금동반가사유상
‘환수’와 ‘활용’, 그 오묘한 방정식 | 해외 환수 문화유산

3부. 재발견, 한국 문화를 이어가다

한국미의 아이콘이 되다 | 백자 달항아리
정체성·상징 품은 또 다른 문화유산 | 옛 무늬
빼어난 옛 명품, 지금 못 쓸 이유 있을까 | 고려청자
현대 문화콘텐츠의 소외된 화수분 | 기록유산

주요 참고문헌
도판 출처



책소개


‘신라 금관’은 사극에서처럼 왕이 평소 쓰던 것이었을까? 삼국시대 ‘천마총 유리잔’에 어떻게 이집트산 광물이 쓰인 걸까? 신라 공주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쪽샘 44호분’에는 왜 바둑돌과 돌절구가 출토됐을까? 국보 · 보물에는 호기심을 자극할 연구 · 분석 결과가 여전히 이어지고, 발굴 · 발견 현장에서는 역사적 진실의 실마리가 될 유물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20여 년간 문화유산 · 현대미술 관련 현장을 종횡무진한 문화부 기자인 저자는 한국 역사 · 문화사에 길이 남을 유물 · 유적을 소개한다. 각 문화유산이 처음 현장에 나타났던 순간부터, 국내 · 국제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가치와 의미, 최근 밝혀진 사실과 논쟁, 당대의 걸작 ‘미술품’으로서 아름다움과 현대적 활용 가능성 등이 한 권에 가득 담겼다. 국보 · 보물과 최근 알려진 문화유산을 두루 살펴, 이미 알고 있는 문화유산은 더욱 신선하게, 처음 보는 문화유산은 발 빠르게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책 속으로

무령왕릉에서 나온 많은 유물 중 지석이 첫손에 꼽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무덤이 무령왕릉이라는 사실을 지석 명문이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무령왕릉이 무덤 주인을 명확하게 확인한 처음이자 유일한 삼국시대 왕릉인 것도 지석 덕분이다. 지석이 있어 새로운 역사적 사실들과 더불어 왕릉 조성 시기와 발굴된 유물의 정확한 제작 연대까지 알 수 있다. 절대연대의 확인은 해당 유적·유물은 물론 다른 유적·유물과의 비교 기준이 된다. 유물과 유적의 연대를 결정하는 편년에 있어 지석은 더할 나위 없는 귀중한 사료이기에 고고학적으로 ‘대발견’이라 할 만하다.
---「더없는 보물, 부실한 발굴·복원_백제 무령왕릉」중에서

그런데 무덤 속에서 나무 상자 한 개가 발견됐다. 그 안에는 다름 아닌 인골들이 담겨 있었다. 일제 발굴자들이 당시에 나온 인골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추정됐다. 이듬해 7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현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 등은 인골 분석결과를 내놓았다. 인골의 주인공은 ‘60~70대 노년층 남성, 신장은 161~170㎝, 사망 시기는 620~659년 사이’라는 게 핵심 내용이다. 무왕의 재위 기간(600~641)과 겹치는 부분이 있는 데다 무덤의 규모, 구조로 볼 때 인골 주인이 무왕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대왕묘가 무왕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은 상황이다.
---「유골, 새 차원의 ‘유물’로 거듭나다_고인골」중에서

그중 흙으로 만든 인물상인 토우들도 흥미로운 유물의 하나다. 춤을 추거나 말을 탄 사람, 성기가 강조된 남성 등 여러 형태의 인물 토우는 물론 말·염소·돼지 같은 동물 토우들 수십 점이 출토돼 신라인의 생활 단면을 이해시켜 준다. 특히 소그드인 형상의 토우도 있다. 소그드인은 지금의 사마르칸트 등 고대 중앙아시아 소그디아나를 근거로 활동하며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문명 교류의 주역들이다. 이 토우들은 머리에 터번을 쓰고, 소그드인들의 긴 옷을 입은 모습이다. 5세기 중후반~6세기 대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토우들은 당시 신라가 소그드인들과 교류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오늘도 발굴 중인 천 년 왕궁터_경주 월성」중에서

조사단의 반구대 암각화 발견은 지역 주민들의 호기심 어린 제보로 가능했다. 조사단의 수차례에 걸친 불교유적 조사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주민들이 ‘저 아래 바위 절벽에도 호랑이 같은 이상한 그림들이 있는데, 조사해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말한 것이다. 조사단은 배를 타고 대곡천을 건너 반구대 암각화가 있는 절벽 아래로 향했다. “배를 가까이 갖다 대어보니 성기를 노출한 채 춤추는 사람과 바다거북이 3마리, 그리고 새끼를 등에 태운 고래 머리 부분만 물 밖으로 노출되고 있을 뿐 기대했던 호랑이는 볼 수 없었다.” 문명대 교수는 암각화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본격적인 조사가 이뤄지기 전이라 그 전모가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것이다.
---「바위에서 찾아낸 선사시대 사람들의 소망_반구대 암각화」중에서

저 : 도재기
1991년 경향신문에 입사해 주로 문화부에서 문화유산·미술 담당 기자로 일했으며 문화부장, 문화·국제·기획 에디터, 논설위원을 거쳐 선임기자로 있다. 다양한 분야 지인들과 박물관·미술관 탐방, 곳곳의 유적 답사를 즐긴다. 청동기시대 유적 발굴조사 현장(경기 용인·1997)과 북한의 문화유산·유적 답사(1998)에서의 ‘특별한 경험’을 계기로 유물, 유적을 다시 보게 됐다. 글 쓰는 기자로서 문화유산의 가치와 의미의 대중화에도 관심이 많다. 《국보, 역사로 읽고 보다》(2016)를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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