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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사지 답사
작성자 심기섭 등록일 09.08.20 조회수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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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조사반에서 충주시 금가면 유송리 65-5번지에 있는 김생사지(충청북도기념물 114호)를 답사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서예의 역사는 한자의 전래와 맥을 같이 합니다. 그 시기는 대개 고조선 말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300년 전 쯤의 일로 추정됩니다. 그때 서법도 함께 들어왔을 터이지만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서예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유물은 비교적 많이 남아있습니다. 광개토대왕비의 서체를 통해서는 고구려인들의 웅장하면서도 소박한 기풍을 느낄 수 있고, 백제 무령왕릉 지석을 통해서는 중국 남조풍의 유려하고 우아한 필치를 느낄 수 있습니다. 삼국을 통일함으로써 고유의 문화를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던 신라는 유물·유적은 물론 서예가의 이름까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이자 서화가인 위창 오세창 선생이 편찬한 역대 서화가 사전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는 무려 16명에 이르는 신라 서예가가 수록돼 있습니다. 양지, 김인동, 한눌유, 설총, 김생 등이 그들입니다. 이들 서예가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분이 바로 김생입니다.

왕희지체 발전시켜 필체 완성

김생은 흔히 ‘동국(東國)의 서성(書聖)’ 또는 ‘해동 서가(書家)의 조종(祖宗)’라고 불립니다. 그는 왕희지의 서체를 본받았으면서도 모방에서만 머물지 않고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완성해 낸 이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고려 때의 문인인 이규보는 그의 저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 김생의 필체를 두고 “신품(神品) 제일(第一)”이라고 평했고, 원(元)의 서예가 조맹부(趙孟부1))도 《동경서당집고첩(東京書堂集古帖)》에서 “김생이 쓴 창림사비(昌林寺碑)는 자획(字劃)에 깊은 전형(典型)이 있어 아무리 당 나라 사람들의 명각(名刻)이라 해도 그보다 더 나을 수 없다”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해동 서가의 조종’이라고 일컬어지는 김생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에 대한 기록은 알려진 것은 많지 않습니다. 그가 스님이었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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