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청주의 지리적 중요성은 어느정도 였는가?-作 박0수, 이0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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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박민수 | 등록일 | 17.07.19 | 조회수 | 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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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청주의 지리적 중요성은 어느정도 였는가?> -30114 박0수, 30324 이0민
1. 서론 삼국시대의 지리적 중심지는 단연 한강일 것이다. 삼국시대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한강을 두고 치열하게 다투어왔으며 세 국가가 각각 한강을 얻었을 때는 그 국가의 전성기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는 한강 유역에 비옥한 토지가 많아 경제력이 향상되고,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교류하기 쉽다는 이유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청주는 삼국시대에서 얼마나 지리적으로 중요했을까? 충북 지역은 5세기가 되면서 삼국의 영향권이 충돌하는 지역이었고, 백제, 신라 뿐만 아니라 고구려측의 유물도 출토되고 있다는 점이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러나 한강의 영향력이 매우 커서 충북지역의 중요성이 소외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안타까웠다. 이에 삼국시대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청주의 지리적 중요성를 알아보는 것을 이번 주제 탐구 보고서의 목적으로 삼게 되었다. 2. 본론 1)청주의 지리적 위치와 철광 자원 먼저 필자는 청주의 지형을 상기한 다음에 그 지형을 통해 청주의 지리적 중요성을 탐구하고자 한다. 청주는 호서 지방의 대표적인 도시로 금강의 제1지류인 미호천을 서북쪽에 두고 있어서 금강지역으로 진출하기 수월하다. 또한 동쪽에 우암산, 상당산, 백족산등의 산악지대가 있어 동쪽의 적을 막기에도 수월하다. 청주 북쪽에는 증평을 통해 음성, 충주방면으로 진출할 수 있으며, 남쪽으로는 보은으로 진출할 수 있다. 이제부터 지도를 통해 자세히 살펴보자. 밑의 첫번째 사진은 청주시 동쪽 지역 지형도이다. 동쪽지역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우암산, 상당산, 백족산등이 있어 동쪽에서 진입하기가 힘들다. 또한 산지에 성을 지어 서쪽에서 쳐들어오는 적에 대항하여 농성할 수 있는 이점을 지녔다. 이런 이유로 조선시대에 상당산성을 축성하였다. 밑의 두번째 사진은 청주시 서쪽 지형도이다. 미호천이라는 큰 강이 있어 서쪽의 적을 차단하기 쉽고, 강을 거슬러서 금강으로 내려올 수 있다. 또한 부모산이라는 산을 통해 서쪽 지역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서쪽의 적을 감시할 수 있다. (밑의 세번째 사진은 국립 청주 박물관에서 찍어온 백제 제철 유적 분포도 이다) 그렇다면 주변 국가들은 이러한 지리적 위치만으로 청주를 쟁취하려 했을까? 청주는 철의 생산지였다. 고대 사회에서 철은 무기와 농기구등으로 중요하게 사용되어졌으므로 주변 국가들이 청주를 중요시 여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위 사진은 국립 청주 박물관에서 찍은 것으로 충북의 백제 제철유적을 나타내고 있는데, 청주 지역에 3곳이 분포해있는 것을 보면 청주는 중요한 철 생산지였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서쪽이나 동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중요한 교통로였고, 더욱이 철 생산지였으므로 주변국이 청주를 중요시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2) 삼국시대 청주의 지리적 중요성 (1) 삼국시대 초기~ 웅진 천도 삼국시대 청주의 최초의 역사기록은 서기 63년(백제 다루왕 36년)에 청주 부근으로 추정되는 낭자곡성까지 국경을 개척하고 신라에 화의를 요청했다는 내용이다(三十六年 冬十月 王拓地至娘子谷城 仍遣使新羅請會 不從). 그리 그 다음해에 백제군이 신라의 와산성(現 보은일대)으로 쳐들어가면서 백제의 대(對) 신라 방어 거점이 되었다. 그러나 이는 후대의 사실을 기록한 면이 강하고,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청주의 옛 이름이 상당현(上黨縣)이었다고 알려져왔다. 원래 청주는 마한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3세기부터 백제의 세력이 남쪽으로 확대되었고, 4세기 무렵에는 청주 전역이 백제의 통치권 안으로 들어왔다. 백제는 동쪽으로부터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청주에 방어거점을 만들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거점은 와우산성으로 백제가 청주 동쪽의 적(특히 신라)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축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청주의 방어를 견고하게 만든 다음, 백제는 청주를 중심으로 와산성(보은), 모산성(괴산), 원산향(예천), 부곡성(군위)등을 공격하는 전략을 폈을 것이다. *밑의 마지막 사진은 국립 청주 박물관에서 찍어온 것으로 충북 지역의 산성의 위치가 잘 드러나 있다. (2) 웅진 천도~관산성 전투 이전 4세기까지만 해도 청주는 백제의 동쪽 변방이었으나, 475년 백제의 수도인 한성이 함락당하고 고구려군이 남하하면서 백제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차령산맥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치고 433년에 신라와 나제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에 대항했다. 고구려는 충주의 국원성과 괴산등지를 장악하고 남하하여 진천 지역을 거치거나 미호천을 따라 남하하는 길을 이용했고, 494년 살수원(現 청원군 미원면)에서 신라군과 교전했다. 그렇다면 왜 고구려는 청주 지역으로 남하하였을까? 청주는 영남과 호남을 잇는 주요 교통로로(여기서 백제와 신라가 오랫동안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인 것도 그 때문이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청주를 장악해야 백제와 신라를 단절시켜고 양측에 군사적 압박을 쉽게 가할 수 있었다. 특히 미호천은 금강과 합류하는데, 금강은 백제의 중심지이므로 청주를 장악하고 미호천을 따라 남하하여 백제의 중심지를 타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백제와의 전쟁에서 주도권을 차지하려면 청주 지역이 필요했다. 494년 살수원 전투 이후에도 신라가 견야성(보은 내북)으로 퇴각, 재정비하여 백제의 구원군과 함께 고구려군을 격퇴한 점과 백제와 신라의 구원군이 고구려군과 치양성(괴산)에서 교전했다는 점을 보아 5세기 후반기에는 괴산, 진천, 청주 등지에서 삼국의 군대가 치열하게 격전을 벌였다고 볼 수 있다. 신라는 470년 보은에 삼년산성을 축성하고, 474년 문의에 일모성을 축성하면서 고구려군을 상대로 문의-보은 등지에서 일진일퇴의 격전을 벌였다. 일모성은 금강을 이용한 수로와 육로가 교차하는 곳이었고, 금강 하류 지역으로 진출하기 좋은 위치였다. 그리고 삼년산성은 후일 나제동맹이 깨진 후에 신라군의 대(對) 백제 공격 거점이 되어 금강으로 진출하는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된다. 신라는 모로성(경북 군위), 구벌성(경북 의성), 굴산성(충북 옥천), 도나성(상주)을 차례로 축성하였는데, 이 성들은 고구려나 백제가 보은등의 주요 방어선을 돌파했을 경우에 그들이 수도 금성으로 진격하는 것을 저지하는 2차 저지선 역할을 했다. (3) 7세기 백제-신라간 국지전 6세기가 되어 고구려가 북쪽의 신흥 세력인 돌궐과 대치하게 되면서 남쪽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지자, 나제동맹군은 즉각 반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550년에 신라군이 백제의 도살성(증평 이성산성)과 금현성(연기 금성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신라가 이때 청주 지역을 장악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부터 나제동맹의 금이 가기 시작했으나 백제는 한강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신라와 계속 손을 잡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같은 해 나제 동맹군은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다시 한강을 장악했다. 여기서 한강 하류지역은 백제가 장악하고, 한강 상류 지역은 신라가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553년 한강 하류를 공격하여 백제군을 한강에서 몰아내고 한강을 장악한 후에 행정구역인 신주를 설치했다. 이는 백제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고, 다음 해인 554년 7월에 백제의 국왕인 성왕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관산성(충북 옥천)으로 진군하여 신라군과 격돌했다. 전투 초반에는 백제군이 유리했으나, 성왕이 전투 중에 전사하면서 백제군은 혼란에 빠졌고, 사기가 오른 신라군은 백제군을 대파했다. 이 전투에서 좌평 4명과 병사 2만 9600명이 전사한 것을 봤을 때, 이 전투는 백제의 한강 지배의 종말과 군사적 치명타를 의미했다. 이후 백제는 힘을 기르다가 7세기가 되어 무왕이 즉위하자, 충북 지역으로 공세를 펴게 된다. 602년과 605년에 경남지역을 침공한 무왕은 청주 지역을 장악한 이후에(551년 이후 백제가 꾸준히 신라와 국지전을 벌이면 청주 지역의 영향력을 회복했다고 추측되지만 진위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611년 10월 가잠성(일본 사학자 이노우에 히데오가 1980년 괴산에 위치해 있다고 주장했다)으로 대규모 군대를 진격시켰다. 여기서 백제군이 청주 지역을 교두보로 가잠성을 공격하여 장악한다면 충주까지도 노릴 수 있었다. 백제군은 증평의 도살성의 신라군을 회피하여 청주 동쪽에서부터 진격해 들어갔고, 보은에서 올 수 있는 신라의 구원군을 차단하기 위해 청원 낭성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리고 평지에 위치한 아성리 토성과 다락산성을 함락시키고 가잠성을 포위했다. 성주 찬덕에 의해 신라군은 가잠성에서 방어태세를 갖추었고, 백제군이 가잠성을 포위하면서 장기간 농성하게 되었다. 신라군은 100여일동안 백제군의 공격을 막아냈고, 신라 조정에서 신주, 상주, 하주의 군대를 동원하여 구원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12월 엄동설한에 출병한 신라군은 동사한 병사가 많아졌고, 도착한 구원군은 백제군에게 격퇴당했다.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신라군은 성주 찬덕이 느티나무에 달려들어 머리를 박고 자결하고, 잔존 병력들이 항복하면서 가잠성을 함락시켰다. (겨울 10월, 신라의 가잠성(椵岑城)을 포위하여 성주 찬덕(讚德)을 죽이고 성을 멸하였다) 7년 뒤, 618년 고구려의 영양왕이 죽자, 신라 조정은 대(對) 고구려 전력인 북한산주의 군대를 빼서 가잠성을 공격하여 탈환했다. 이에 백제군은 구원군을 보냈지만 신라군 지휘관 해론이 이끌던 군대와 격전을 벌였고, 끝내 패하면서 가잠성의 주도권을 상실했다(무왕 19년(서기 618), 신라의 장군 변품(邊品) 등이 와서 가잠성을 공격하여 성을 다시 빼앗아갔다. 이때 해론(奚論)이 전사하였다.). 백제는 괴산 지역의 주도권을 다시 찾기 위해 623년 군사를 보내 늑노현(괴산읍)을 습격했다. 당연히 늑노현을 습격할 때도 청주는 백제군의 진출 교두보가 되었다. 이어 백제는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보다 청주를 통해 괴산등지로 진격하여 교통로를 끊어버리는 전략을 이용했고, 628년 다시 군대를 거느리고 청주를 통해 가잠성으로 진격했으나 무위로 돌아갔다. 시간이 흘러 의자왕 시기에도 백제의 공격은 계속되었고, 신라가 여당전쟁에서 당군을 돕기 위해 행동에 나설 때 백제가 충북 지역에 공세를 펴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660년 신라군 5만명이 경기도 이천에서 남하하여 탄현(대전광역시 식장산 동쪽)을 통과하여 황산벌(충남 논산)에서 계백의 백제군 5천명과 격돌한 것을 미루어 보아 본인은 신라의 대군이 청주 지역에 있는 백제의 수비군을 격파하고 탄현으로 내려왔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결국 백제가 660년에 그대로 멸망하면서 신라가 청주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3. 결론 지금까지 삼국시대의 흐름속에서 청주의 지리적 위치와 중요성을 탐구해보았다. 청주는 영남과 호남을 잇는 요충지였고, 북쪽의 충주를 통해 한강유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남쪽으로 진출하기를 원하는 고구려와 북쪽과 동쪽의 전진기지이자 수도권인 금강의 방어 강화가 필요했던 백제, 서쪽의 금강으로 나아가기를 원했던 신라의 치열한 격전지가 되었고, 크고 작은 전투들이 많이 일어났다. 원래 청주는 마한의 영토였지만 1세기에 백제가 청주를 차지하였고, 청주는 백제의 동부 전진기지가 되어 백제 문화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5세기가 되면서 큰 변화가 생긴다. 수도 한성이 고구려군에게 함락되어 백제가 한강 유역을 상실했고, 고구려군이 충주까지 남하했다는 것이다. 백제는 차령산맥을 중심으로 고구려와 전투를 벌였는데, 고구려군이 방어선을 뚫고 청주까지 내려와 백제-신라 연합군과 전투를 벌인 적도 있었다. 고구려군이 청주에 내려오면서 고구려 문화가 유입되었는데, 대표적인 유적지로는 청원의 남성골 산성이 있다. 6세기가 되면서 신라군이 도살성, 금현성을 차지하였고,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군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청주는 잠시 신라의 영향권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위덕왕대부터 백제는 절치부심하면서 군사력을 키웠고, 600년 무왕이 즉위하면서 백제는 본격적으로 공세에 나서게 되었다. 한강에 있는 신라군의 전력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백제는 충주등지로 진출하여 교통로를 끊으려는 전략을 사용했다. 청주는 이 전략의 전진기지로 백제에게 꼭 필요한 요충지였고, 611년에 무왕의 대규모 백제군이 괴산의 가잠성까지 청주 동쪽 산지를 이용하여 무리 없이 진격한 것을 봤을때, 청주는 그 이전에 백제와 신라의 산발적인 국지전에서 백제가 우위를 점하여 백제의 영향력으로 다시 들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612년이 되어 가잠성이 백제군에게 함락당하며 괴산 등지가 백제의 영향력으로 들어왔지만, 618년 신라가 대(對)고구려 전선의 군대(북한산주 병력)를 동원해서 설욕전을 감행하여 백제는 허무하게 가잠성 일대를 다시 신라에게 뱉어내야 했다. 하지만 백제는 적들의 금강권 진출을 막고, 재진출을 노리기 위해 청주 지역을 지켜냈다(다만 이는 고구려의 내부수습이 완료되는 시점이라 고구려군이 병력이 빠진 북한산주로 진출할 수 있기 때문에 북한산주의 병력을 회군시켰다고 추측된다). 이후 청주는 백제의 충북 지역 공세의 전진기지로 활용되었는데, 여제동맹 이전까지 백제는 한강으로 진출하기보다 충북지역, 경남지역으로 진출한 것이 많았을거라고 본인은 추측하고 있다. 한강 공격은 여제동맹으로 인해서 고구려군이 호응을 해주었기에 가능했었기 때문이다. 643년 11월에 고구려와 화친 맺고 당항성 공격에 나섰던 점과 655년에 백제-고구려-말갈 연합군이 한강의 33개 성을 함락시킨 점이 그 예시다. 그 이전까지는 백제 일국의 군사력으로는 한강을 수복하지 못했으며 이런 성과를 내기 어려웠다(왜냐하면 관산성 전투 이후로 가야와 한강이 신라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제는 충북지역으로 계속 진출하려 했고, 그 중심에는 청주가 있었다. 이는 청주가 한강 못지않게 중요했던 지역임을 보여주고 있으며, 앞으로 사람들이 삼국시대 청주역시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참고문헌 조선시대 충북역사 네이버 지식백과-삼국사기 청주의 역사와 사람들-청주문화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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