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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이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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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수행평가)수정본
작성자 이재성 등록일 15.06.07 조회수 62

역 사

이 재성

(본 내용은 2박3일 로 구성된 가상시나리오임을 밝힘니다.)

첫째날 : AM7 기상

아침밥 먹고 세수하고 갈 준비를 하였다.

오늘은 평소보가 일찍일어났다. 왜냐하면 경주의 문화재와 먹거리를 체험해보는 코스를 저번주에 경주사이트에서 알압고 신청을 했기때문이다.

12시: 경주문화재 탐방 팀의 집합장소에 모여 갈 준비를 하였다.

승합차 안에서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이 모임에 참석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가다보니 배가 점점 고파왔다.가이드에게 얘기를 했더니 이제 곧 점심을 먹을 거라고 했다.

경주에도착하자 가이드가 버스에서 내리며 점심거리를 사오겟다고 했다.치킨이나 피자를 생각하며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돌아온 가이드의 손에는 포장된 김밥 몇줄이 들려있었다.

적이 실망을 하며 김밥을 집어 입속에 넣는순간 입안에 퍼지는 부드러움에 놀랐다.

가이드가 이 깁밥은 경주 교리김밥이라고 알려주엇다. 아까 찰나의 실망이 부끄러울 정도로 맜잇었다.

김밥을 먹다보니 어느샌가 불국사에 도착했다. 평일 인데도 사람이 붐볐다.

붉게물든 불국사를 보며 신라시대 문화재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가이드의 말로는  경주 토함산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짓기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지만 이후 조선 선조 26년(1593)에 왜의 침입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다고한다

이후 극락전, 자하문, 범영루 등의 일부 건물만이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1969년에서 1973년에 걸친 발굴조사 뒤 복원을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전쟁으로 이렇게 훌륭한 문화재가 파손됬다는 것을 알자 일본사람들이 미워지려고 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다스리며 일행을 따라갔다.

가이드는 일행을 석가탑으로 데리고 가더니 비극적인설화를 알려주었다.

 

"신라에서 석가탑을 창건하기 위해 석공인 아사달은 불렀습니다.
아마 아사달이 굉장히 이름난 석공이었나봐요...백제사람을 신라까지
부른것을 보면...

아무튼 아사달은 신라로 가고 집에서 하루하루 외로이
아사달은 기다리던 아사녀는 신라로 가기로 결심했지요
결국 고생고생해서 불국사에 도착했지요.
아사녀는 남편을 볼수 있다는 기쁜마음에 달려갔으나.....
그 절의 스님은 아직 절이 다 완성되지 않았고 완성되기전에
석공을 만나면 절을 짓는 마음이 흐트러진다고해서
만날수 없다고 했답니다.
하지만, 아사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조르자 그 스님은
절 옆에 한 연못이 있는데 그 연못에 탑의 그림자가 비치면
다 완성한 것이니 그때 아사달을 만나라고 했답니다.
이에 아사녀는 계속 그 연못만 쳐다보고 있었죠....
몇주일 몇달이 지나도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결국 지쳐버린 아사녀는 죽게되지요 그때 탑을 다 만든 아사달은 그제서야 아내의 소식을 듣고 그 연못으로달려갔으나 아사녀는 없었답니다.그래서 들고있던 망치와 정으로 그대로 조각을 해서 아사녀를 닮은 부처상을 만들고 떠나갔대요

그후로는 그 연못에 그 탑 즉 석가탑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아서
無暝塔 그림자가 없는탑 무명탑이 되엇다네여'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듯고 아사녀와 아사달의 명복을 빌며 점심을 먹기 위해 승합차에 몸을 실었다.

 

이번에는 무엇을 먹을까 내심기대를 하며 갔다.

도착한곳은 현지 가이드가 추천해준 추어탕집.

현지에서 꽤유명한 집으로 소문이 났다한다.우리는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해어졌다.

 

...........................................................2일째..................................................................................................................

아침을 간단히 때우고 집합장소로 부랴부랴 달려갔다.일행은 어젯밤 각자 알아서 숙박할곳을 찾아 헤맨 이야기를 꺼냈다.굉장히 싼 값에 놀라 이 코스를 선택했지만 여러모로 실망을 안겨주는 코스이다.다음에 코스를 정할때 숙박도 포함되 있는 코스를 골라야 갰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국립경주 박물관으로 갔다.

우리는 그곳에서 성덕대왕 신종을 볼생각이다.성덕대왕신종의 대한 정보를 간추려보면

신라 경덕왕은 부왕인 성덕왕의 위업을 추앙하기 위하여 구리 12만근을 들여 이 대종을 주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 뒤를 이어 아들 혜공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혜공왕 7년(771)에 이 종을 완성하고 성덕대왕신종이라 하였다한다.

 

이 종은 처음 봉덕사에 받들어 달았으므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종을 만들 때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애틋한 속전이 있어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러 왔다. 봉덕사가 폐사된 뒤 영묘사로 옮겼다가 다시 봉황대 옆에 종각을 지어 보존하고 있었다.

 

1915년 종각과 함께 동부동 구박물관으로 옮겼으며, 박물관이 인왕동으로 신축 이전하게 되어 1975년 5월 26일에 이 종각으로 옮겨 달았다고한다.

종을 가가이에서 보니 크기에 놀랐다.이 정도의 종을 만들기위하여 얼마나 많은 신라시대 국민들의 노력과 정성이 들어갔을 까라고 생각하고있는 도중에 가이드가 이 종에 얽힌 설화를 들려주엇다.

"성덕대왕 신종을 제작하기 위해 34년이나 매달려 왔던 신라인들은 실패가 계속되자 신종의 소리를 얻기 위해 어린아이를 희생양으로 바치기로 했고, 불국토의 도래를 알리고 신라의 종소리를 만들기 위해 엄마 젖을 빨던 한 아이가 펄펄 끓는 쇳물 항아리에 바쳐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종을 칠 때마다 에밀레~ 에밀레~ 하는 소리가 났고, 어린아이가 엄마를 부르는 애절한 소리가 종 속에 깃든 것이라고, 봉덕사종, 혹은 성덕대왕 신종이 에밀레종이 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왜 석가탑이나 이 종처럼 훌륭한 문화 재에 이런 가슴아픈 사연이 전해질까라고 생각했다.

첨성대를 보러가는 내내  생각했지만 뚜렸한 확답을 얻지못했다.

생각을 많이 해서인지 배가 고팠지만 모두들 점심때가 지나고 저녂때가 가워왔지만 배가고프지않은 모양이엇다.

어쩔수없이 어젯밤숙소를 찾을때 산 경주황남빵으로 끼니를 때웠다

빵속의 팥고물 맜이 일품이었다.

빵을 다먹어갈때 즈음 첨성대에 도착했다.이미 해가저물어 어둑어둑해졌다.아가낮에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너무많은 시간을 보냈다.한참을 걸어가니 경주첨성대가 보였다.

첨성대 안내표지판에다르면 현존하는 첨성대 중 대표적인 것은 신라시대 경주에 있었던 것이다. 별을 보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국가의 길흉을 점치기 위하여 별이 나타내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역법()을 만들거나 그 오차를 줄이기 위하여 별이나 일월오성(:해와 달 그리고 지구에서 가까운 금성·목성·수성·화성·토성의 다섯 행성)의 운행을 관측하는 용도로 사용했다고 한다.모두들 저녁이라 많이 지친 상태였다.그래서 인지 다들 숙소로 돌아가고 싶어했다.가이드도 그 부분에서는 게의치 않아했고 오늘여행은 여기서 끝이낫다
..............................................................3일째......................................................................................................
깨어나보니 아침8시였다 부랴부랴 씻고 옷을 챙겨입으니 8시30분 버스시간은 9시45분 차를 예약해논 터라 시간이 부족했다.우선 집합장소로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엇다.
모두 아침을 먹고 문화재를 볼 생각 인것 같지만 나에게는 그럴시간이 없다. 아침을 사주갰다는 호의를 거절한채 경주 터미널로 가는 차에 몸을 실었다.
시간이부족한곤게로 터미널에서 경주비빔밥을 먹었다.
먹고나니9시 30분 시간을 딱맞추어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지친몸을 버스좌석에 기대니 참을 수없는 졸음이 솓아졋다.어서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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