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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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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란테 델리 알리기에리
작성자 박지영 등록일 17.02.02 조회수 125
두란테 델리 알리기에리는 쉽게 단테라고도 불린다. 단테는 이탈리아 피렌체에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단테의 이름의 뜻은 참고 견디는 자라는 뜻이 있다. 1274년 따스한 봄, 9살이 되었던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다. 그 순간을 단테는 이렇게 표현했다고 한다. "내 가슴 가장 깊숙한 곳에서 역동적인 감정이 솢구쳐 올랐다" 이런 말이 과연 9살이 된 어린이가 말할 수 있는 말인가 한참 생각했다. 그렇게 가슴 속에 품은 베아트리체를 생각하면서 단테는 살았다. 그로부터 9년 뒤에, 그들은 아느로강에서 우연히 다시 재회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사랑하였지만, 베아트리체는 돈이 많은 집의 아들과 약혼을 하였기때문에, 결혼은 불가능하였다.그렇게 첫사랑을 못잊은채 산 단테는, 그로부터 또 몇년뒤 베아트리체가 결국 24살에 숨졌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단체는 그 일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먹게 된다. 그런 베아트리체를 그리며 슨 시집이 바로 단테의 새로운 인생이다. 여기서 중세시대때에는 오직 신만이 사랑을 했다고 알려지는데, 오직 단테만이 인간의 숭고한 사랑을 표현했다고 한다. 그런 중세시대와 르네상스, 근대를 나누는 중요한 기점이 또 그가 쓴 신곡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인생이라는 시집의 집필을 권유한 사람은 바로 뒤도 카발칸티라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이탈리아의 시인이고, 단테와 함께 청신체파의 가장 중요한 시인으로서, 단테가 자신의 시집을 바치기도 하였다. 카발칸티는 단테의 친구이자 스승이자 제자였다. 그로부터 베아트리체가 숨진 후에 단테는 기병대 일원으로 점투를 참전했다. 이때부터 단테는 숙고하는 삶이 아닌 활동하는 삶을 추구하였다. 당시 유럽에서는 교황파와 황제파로 나뉘었는데 , 단테는 교황파였고 정치를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35세에 이탈리아 피렌체 최고 공직 프리오리에 오르게 된 단테였다. 프리오리는 피렌체의 최고행정기관이자 6인 집단 수상체제 법안의 제안권을 가지며 공공의요구가 있을 시 재판에도 관여를 하였던 그런 기관이었다. 그리고 1300년 단테는 프리오리로서 대희년을 맞아서 로마를 가게 되었다. 신곡 중에서 이것은 마치 희년에 군중이 너무 많아 로마사람들이 그들을 다리위로 지나가도록 배려했기에 한쪽에서는 모두 이마를 성 쪽으로 돌려 성 베드로 성당을 가고 다른 쪽은 산쪽으로 가는 것돠 같았다. 라고 단테는 말했다.그리고 단테가 그렇게 로마에 있는 동안에 정치적 격변으로 인하여 피렌체에 추방을 당했다. 그 당시 단테는 나는 순례자처럼,아니 거지처럼 떠돌고 있다. 행운의 여신은 내게 가혹한 운명을 안겨주고 나는 인생을 실패한 패배자로 살아간다. 돛이 달려있지 않은 배에 올라탄 나는 인생을 길패한 패배자로 살아간다. 라고 말했다. 그렇게 단테는 라벤나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이렇듯, 단테는 지옥과 같은 삶을 살았다. 과연 그런 단테가 우리에게 주는 희망의 메세지는 무엇일까하고 생각한다. 나는 더 열심히 살아라 인 것 같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편 천국편 연옥편을 썼는데, 사람들에게 지옥편이 가장 인기가 많다. 왜냐면 제일 실제와 같이 쓴 것 같기 때문이다. 왜냐면 단테는 그의 반세기때 천국에 잠깐 다녀왔다가 그 이후로는 계속 지옥에만 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우리나라을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데, 과연 단테가 살았던 지역보다 더 좋은 이 곳을 과연 지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하는 영문이 든다. 단테는 내가 존경하는 인물 중에 한명이다. 단테를 처음 알게된 이유는 인페르노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 단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단테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다. 그러다보니 단테를 연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단테가 우리에게 주는 삶의 희망적인 메세지가 너무나도 좋아서 그를 더 알고싶어졌다. 단테를 연구하는 데에만 수십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몇년 동안은 그를 더 알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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