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이향(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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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신혜인 | 등록일 | 17.07.06 | 조회수 | 18 |
너무나 위대했던 세종의 뒤를 이었기 ??문인지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문종역시 부전자전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문종은 학문과 무예 모두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과학에 대한 관심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사실, 장영실의 발명품으로 알려진 측우기 역시 문종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졌고, 4군 6진 개척에 큰 기여를 한 화차 역시 문종의 아이디어였다. 그리고 한글 창제 당시 세종이 맘 놓고 상의할 수 있던 유일한 사람이 문종이였을 정도다. 문무를 쌓고, 세종을 돕는 일만으로도 바빴지만, 조선의 세자인 그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중요한 임무는 조선 왕조를 이어나갈 아들을 낳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14살에 첫 번째 결혼, 16살에 두 번째 결혼을 했지만 실패로 끝났고, 세 번째로 결혼한 세자빈과의 사이에서 27살에 마침내 아들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왕후는 아들을 낳은 지 3일 만에 목숨을 잃었고, 이로써 그의 아들 역시 가장 든든한 지원군을 잃은 셈이 됐다. 세종의 병환으로 왕의 업무 일부를 넘겨 받은 이후 세종의 병환이 날로 깊어지자, 문종은 더 많은 왕의 업무를 맡아 처리하게 됐다. 세종의 재위 중 마지막 8년 동안은 대리청정을 한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다. 학문만 너무나 가까이한 나머지 건강이 좋지 않았던 세종과 달리, 문종은 문과 무에 모두 능해 직접 몸을 쓰는 것도 좋아했다. 특히 진법에 관심이 많아 조선의 어떤 장수보다 많은 진법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의 병력 강화는 물론, 자신이 문무를 모두 갖춘 왕이라는 것을 알리기 유ㅟ해, 진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동국병감>이라는 책을 편찬했다. 이 책은 후대까지 길이 남아 조선 군대의 기본 진법서 역할을 했다고한다. 세종 시대, 훌륭한 인재들이 많아 태평성대를 이루었지만, 그것이 그 뒤를 이은 문종에겐 고민거리가 되었다. 바로 '내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정의 명재상들은 세종 대부터 이름을 떨쳐, 왕인 문종조차 어찌할수 없을 정도로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문종은 '내 사람 만들기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6품 이하 낮은 관직의 신하들과 돌아가면서 만날 기회를 만들 것이다. 이런 윤대를 통해 왕이 낮은 신하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인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은 물로, 그중 인재들을 골라 그의 사람으로 키워나가려 한 것이다. 세종 대까지만 해도 고려의 역사를 부정하는 분위기였다. 고려에 문제가 있어 조선이 세워진 거라는 논리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두면 고조선부터 이어져 내려온 조선의 긴긴 역사가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문종은 고려의 역사를 제대로 정리한 역사서, <고려사> 139권을 완성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고려 역사를 연도순으로 보기 편하게 정리한 <고려사절요>도 완성했다. 이를 통해 조선의 뿌리 깊은 역사를 잊지 않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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