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도(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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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신혜인 | 등록일 | 17.06.03 | 조회수 | 21 |
1428년 진주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 사건의 근본 원인을 찾다알게된 충격적인 사실은 이 사건은 백성들이 글자를 몰라 예의범절과 옳고, 그름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효와 충에 관한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삼강행실도>를 만들어, 글을 모르는 백성들이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와 예의범절을 쉽게 이해하고, 배울 수 있게했다. 왕이 된 이후, 세종은 조선의 왕 중에 가장 많은 업무를 보고받고, 세세하게 챙기며 처리해 나갔다. 그러다 과로 때문인지, 고기 편식 때문인지, 소갈증에 걸렸다. 내의원에서는 더 무리하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고 경고했다. 결국 세종은 국정에서 한발 물러나, 국가의 중요 업무들을 의정부에서 논의한 뒤, 삼정승의 합의를 걸쳐 결정하라는 명을 내렸다. 세종이 이런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건 당시 조선에 황희와 맹사성, 김종서 같은 최고의 재상들이 있었던 덕분이었다. 삼정승에게 업무를 맡긴 후 녹초가 되었던 몸이 어는 정도 회복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쉬는 기간에도 책에서 만큼은 눈을 떼지 않았더니, 이번에는 눈병이 났다. 그래서 왕의 업무 일부를 세자에게 넘긴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을 이용해 신하들 몰래 언어학 공부에 몰두하며 백성들을 위한 문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하루 종일 농사일에 매달리다 보니 한자를 공부할 시간도, 여력도 없어 대부분 까막눈이었다. 게다가 조선의 말은 중국과 달라,우리말을 한자로 정확히 옮기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다. 그래서 세종은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문자인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물론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일이 쉽진 않았다. 본래 눈이 좋지 않던 세종은 한쪽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롤 눈병이 심해진 데다, 반대할 것이 뻔한 신하들의 눈을 피해 몰래 한글 창제를 진행해야 했다. 그럼에도 세종은 발음기관을 본 뜬, 자음 17자와 모음 11자 총 28자의 문자를 완성해 냈다. 훈민정음을 완성했지만, 또 다른 산을 넘어야 했따. 훈민정음의 반포를 신하들이 격렬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특히 최만리는 '중국과 다른 문자를 만드는 것은 큰 나라를 모시는 예의에 어긋나고,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것이며, 이두가 있기 때문에 굳이 새로운 문자를 만들 필요가 없다'며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했다. 화가난 세종은 최만리를 비롯해 반대 상소를 올린 신하들을 모두 감옥에 가두었다. 하지만 임금의 명에 반대한다고 감옥에 가두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 여겨 하루만에 풀어주었따. 다행히 그런 세종의 확고한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세종 앞에서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하는 이들은 없어졌다. 중국의 천문체계를 따라 썼더니 조선에서 일어나는 천문현상에 맞지 않아 틀리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천체 현상은 하늘의 뜻'이라고 여겨져, 천체 현상을 미리 예측해 대응하지 못하면, 왕의 권위를 인정받기 힘들었다. 이 때문에 천체 현상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설명할 수 있는 역법서의 편찬은 중요한 사업이었다. 세종은 이 중요한 사업을 이순지에게 맡겼고, 그는 조선 실정에 맞는 <칠정산외편>을 완성했다. 이런 정확한 역법체계의 완성은 농사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세종은 한문정음 완성 후 3년간 궁 안에서 관리들에게 훈민정음을 사용하게했다. 또 죄수들의 조서나 판결문뿐 아니라, 국왕이 내리는 교서에도 한자와 훈민정음을 함께 사용했다. 그런 세종의 노력 덕분이었는지, 훈민정음이 워낙 배우기 쉬웠기 때문인지, 반포 이후 백성들은 훈민정음을 쉽게 익히고 사용했다. 특히 편지글이나 소설 등에 쓰이면서 점점 더 많은 백성들이 훈민정음을 널리 상용하게 되었다. 이렇듯 세종은 재임기간 내내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펴고, 백성들에게 사랑받는 행복한 와이었지만, 하늘은 세종의 가족의 행복엔 그리 관대하지 않았다. 맏딸 정소 공주는 어렸을 때 요절했고, 1444년엔 광평 대군이, 1445년에는 평원 대군이, 1446년에는 부인인 소헌 왕후까지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게다가 세종의 건강역시 점점 더 악화되기만 했으니. 이렇게 몸도 마음도 ?해지자, 종교에 기대게 되었다. 그래서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하는 조선에서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궐 안에 절까지 지어며, 불교를 통해 마음의 평안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불교에 심취한 세종은 재임 기간 내내 발전시킨 활판이쇄 기술로 부처의 덕을 칭송한 <월인천강지곡>을 찍어냈다. 이때 한자옆에 훈민정음으로도 함께 표기해 빅성들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잇게 했다. 불교를 금기하기는 했지만 백성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불교가 성행하고 있었기 ??문에 불교서적에 훈민정음을 함께 적어두면 훈민정음이 널리 퍼지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활판인쇄 기술의 발달로 더욱 많은 책을 찍어낼 수 있게 돼, 문화와 기술이 널리 퍼질 수 있게 되었다. 세종은 32년간의 긴 재임기간 동안 조선의 어떤 왕보다 많은 업적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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