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도(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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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신혜인 | 등록일 | 17.06.02 | 조회수 | 21 |
세종대왕은 학구열도, 백성을 아끼는 마음도 그 누구보다 커서,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인정받는 왕이다.문자가 없어 고생하는 백성들에게 훈민정음을 만들어 반포했고, 능력 있는 인재라면 노비라도 관리로 등용했다. 또한 과학과 예술에도 관심이 많아, 다양한 과학 기술들을 발전시키고, 궁중 음악의체계를 세웠다. 그리고 오랑캐들을 물리치고, 조선의 영토를 확장해 현재 대한민국의 영토를 이때 완성하기도 했다. 세종이 왕위에 올라 가장 먼저 한 일이자, 정말 잘한 일은 바로 이종무를 보내 대마도를 정벌한 일이다. 대마도는 일본 해적들의 본거지로, 이곳의 해적들이 수시로 조선의 해안가 마을을 습격하는 통에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에 세종은 이종무를 대장으로 한 조선 수군을 파병해, 대마도를 정벌하게 했다. 이종무는 대마도로 출정해 왜구들의 우두머리인 대마도주를 잡아, '다시는 조선의 백성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항복문서를 받아오는 성과를 올렸다. 대마도를 정벌한 다음 해에는 조선의 학문을 발전시키고, 훌륭한 인재를 키우기 위해 집현전을 설치했다. 물론 집현전은 고려 시대부터 있어왔지만, 존재감은 그야말로 유.명.무.실. 이에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이 학문에만 집중 할 수 있도록, 때맞춰 승지도 시켜주고, 필요한 책들을 가장 먼저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또, 출근하지 않고 집이나 산에서 책을 보는 것도 허용해 줬다. 그러자 인재들이 너도나도 집현전으로 몰려왔다. 정인지, 신숙주, 박팽년, 성삼문 등이 모두 집현전을 통해 배출된 인물들이다. 세종은 노비 출신이라도 능력만 있다면 궁으로 불러 일하게 하고, 벼슬까지 주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장영실이다. 이후 세종은 장영실에게 조선의 다양한 천문 관측 기구의 제작을 맡기고, 중국으로 보내 선진 기술을 배워오게 했다. 장영실은이런 세종의 배려에 부응하듯 천문 관측 기구 제작으로 보답했고, 이에 세종은 장영실을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인재 등용의 핵심은 인재에게 어떤 재능이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세종은 집현전에서 근무하던 박연에게 남다른 음악적 재능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박연의 재능을 살려, 그에게 궁궐 음악을 정리하는 임무를 주었다. 이후 박연은 편경을 만들어 음의 기준으로 삼고, 다양한 궁중음악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세종의 기대에 부응했다. 이후에도 박연은 조선음악사에 큰 성과를 남겨,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3대 음악의 성인으로 불리며 후대까지 추앙받는 위인이 되었다. 재임 초기에 대마도 정벌까지는 완수했지만, 왜구들은 당장 먹고 살 것이 궁해지면 또다시 해적질에 눈을 돌릴 게 뻔했다. 그래서 세종은 내이포, 부산포, 염포에서 일본이들의 교역 활동을 허락해 주어?? 또한 삼포에는 왜관으로 두어 일본인 60명의 거주도 허락해 주어?? 단, 삼ㅍ ㅗ에 들어올 수 있는 배의 수를 제한해, 조선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게 조절했다. 이런 조치 후에 왜구들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왕권이 안정되고, 조선을 약탈하는 왜구도 줄어들자, 백성들의 생활을 찬찬히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그랬더니 농부들의 실력에 따라 농업 생산량의 차이가 큰 점이 눈에 확 띄었다. 그래서 각 지역의 농사 잘 짓는 농부들의 농사법을 모아 <농사직설>이라는 책으로 발간했다. 그 결과 이 책에서 소개된 이앙법이 널리 퍼져 수확량이 늘어난 것은 물론, 추수 후 보리를 한 번 더 심을 수ㅠ 있게 되어 백성들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대마도 문제 해결로 조선 남쪽 해안의 왜구들은 잠잠해졌지만, 북쪽 국경 부근 이민족들의 잇따른 침입은 여전히 조선의 큰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김종서와 최윤덕 장군을 불러, 북방의 여진족을 최대한 멀리 몰안고, 북쪽 경계에 성을 쌓아 조선의 영토를 확실히 할 것을 명해?? 이에 최윤덕은 압록강 상류 지역에 4군을 개척했고, 김종서는 두만강 유역게 6진을 개척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로써 21세기 대한민국 같은 국경선이 완성되었다. 관직에 오른 장영실은 본격적인 성과를 내놓기 시작했다. 물의 힘으로 작동되는 물시계 자격루를 만들어 내는가 하면, 천문 관측을 위한 대간의, 소간의를 비롯, 해시계인 앙부일구 등 셀 수 없이 많은 과학 발명품들을 완성시켜 세종을 기쁘게 했다. 그의 성과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20여만 자의 금속활자와 그밖에 왕실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들도 만들었다. 하지만 1442년 3월, 아타깝게도 그가 만든 세종의 수레가 부서지면서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었고,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세종의 관심은 사회적 약자인 여성, 아이, 장애인에게까지 이어졌다. 부모를 잃은 아이와 남편을 잃은 여자에게는 나라에서 쌀을 지급해 끼니를 거르지 ?方?해주었고, 장애인과 노인에겐ㄴ 세금을 면제해 준 것은 물론, 필요할 경우 장정들을 보내 도움을 받게 했다. 또한 노비라도 아이를 낳으면 여자에게는 100일간의 휴가를, 그 남편에게는 30일간의 휴가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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