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장화홍련전을 그저 무서운 귀신들이 나오는 섬뜩한 이야기인 줄 알았다. 심지어 장화와 홍련이라는 글자가 이름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표지를 보고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호기심에 읽어 보게 되었다. 내용이 내가 생각했던 이야기와 많이 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야기 중간, 중간마다 요즘시대에 사는 나에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한 둘이 아니였다. 친아버지가 계모에게 홀려서, 친딸을 죽일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었다. 과연 자신의 핏줄을 죽일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을 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답은 "아니"였다. 하지만 때는 조선 세종때였으니 내가 알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마냥 섬뜩하고 소름끼치는 내용을 담은 책인 줄 알았더니, 그 사연이 확실했고 너무 슬프고 절절한 내용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몇가지 더 있었다. 만약 친아버지가 죽으라고 하면, 우리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죽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점이었다. 나는 이 질문의 대답도 역시 "아니"였다. 아무리 내가 잘못을 저지른다고 한들, 죽으라고 해서 두려움없이 바로 죽지는 못 할것이다. 하지만 장화와 홍련이는 그 시대의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들었는지, 아니면 그 때 그 나라의 법이 그러한 것인지 우리는 역시 알 수 없다. 하지만 딱 한가지 알 수 있고, 지금 이시대까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남은 인생에 대한 미련이 아닌가 싶다. 지금까지도 우리나라는 효를 중시하는 예의바른 나라고, 어느나라든 다 마찬가지로 죽고 나면 남은 인생에 대한 미련쯤은 있을 것이다. 다시 살고싶고, 그때 더 열심히 살 걸이라는 후회를 하고, 내가 없는 인생에 내 지인들을 걱정하는 그런 마음은 있을 것이다. 수많은 미련 중에서도 장화는 남은인생 중 언니 없이 살아야하는 홍련을 위해 살라고 말해주고, 그래도 죽음을 결심한 홍련이는 결국 죽게 되지만 시간이 흐르고 그 자매는 다시 인간에게 와서 억울한 인생이야기를 하고, 도와달라고 요청을 한다. 이 역시 당연한 우리 인간의 미련이 아닐까 싶다. 장화홍련전은 자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지만, 그 안에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넘쳐나는 것 같다. 가끔은 편견없이 책을 바라보는 연습도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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