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족실록 영조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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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김강민 | 등록일 | 18.01.30 | 조회수 | 116 |
영조의 생애와 치세 영조의 휘는 금, 자는 광숙으로, 숙종의 둘째아들이며, 생모는 숙빈 최씨이다. 6세에 연잉군으로 책봉되었고 경종1년(1721년)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가4년(1724)8월25일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영조가 왕으로 즉위했다.영조는 왕위에 직후 소론인 이광좌, 조태억을 영의정 , 좌의정으로 삼고 , 세제 책봉을격렬하게 반대했던 유봉휘을 우의정에서 박탈했으며, 신임옥사 때 자신을 모해한 김일경과 노론 역모설의 고변자인 목호룡을 처형하였다. 1727년, 영조는 갑자기 노론을 축출하고 이광자를 중심으로 하는 소론 정권 소론 정권 을 구성했는데 이를 '정미환국'이라고 한다. 영조의 탕평책이 본궤도에 오른 것은 1728년 무신란(이인좌의 난)을 겪고 나서였다. 1757년(영조 33년) 2월에 정성왕후가 죽고 1757년 (영조 35년)2월에 정순왕후가 계비로 들어오자 그녀의 아버지 김한구를 중심으로 또 하나의 척신세력이 등장해 분열이 가속화되었고, 소론과 남인은 이런 틈새를 이용하여 독자 세력화를 시도하였다. 1762년(영조 38년), 영조가 대리청정하던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만든 참변이 일어나고 만다. 1729년, 영조는 사형수에 대해 '삼복법'을 엄격히 시행했고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켜 백성들의 억울한 일들을 왕에게 직접 알리도록 하였다. 1729년에 오가작 통법 및 이정법을 엄격하게 하여 탈세 방지에 힘을 썼다. 1760년에는 개천(오늘날 의 청개천) 을 준설하고 준천사를 설치해 이를 지속적으로 관리하게 했으며, 영조 재위 기간에 시행딘 경제 정책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균역법' 이다. 1729년에 감란록을, 이듬해에 숙묘보감을 편찬했고 1732년에는 이황의 퇴도언행록 등을 비롯한 많은 책들을 펴냈다. 영조는 어지러운 당쟁 상황에서 왕위에 올라 수십 년 동안 정치를 안정시키고 우리 문화를 발전시켰으나 80세가 넘는 나이까지 왕위에 있어 말기에 이르러서는 병약하게 되었고 , 제대로 국정을 돌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그것이 국정 혼란의 원인으로 작용되기도 했다. 1776년 3월 5일, 경희궁의 집경당에서 재위 기간 51년 7개월 만에 8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중국 조정에서 시호를 '장순'이라 했고, 조선 조정에서 묘호를 '영종' 으로 올렸다가 영조로 개칭되었다. 여기에 여러 시호가 합쳐져 정식 묘호는 '영조장순익문선무희경현효대왕'이다. 2명에 정비에 4명의 후궁의 두었고, 그들에게서 2남 7녀를 얻었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의 동구 릉역에 마련되었고, 능호는 '원릉' 이다. 소감문 영조는 비록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였지만 아주 좋은 일들을 많이 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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