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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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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세종편
작성자 김강민 등록일 18.01.30 조회수 161

세종의 생애와 치세



세종은 태종의 3남이며 원경왕후 민씨의 소생으로,1397년 4월 10일에 한양의 잠저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도, 자는 원정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성격이 곧고 인정이 많았으며 독서를 좋아한 덕분에

태종의 사랑과 신뢰를 받았다. 반대로, 세자였던 제(양녕대군)는 학문을 싫어했고 사냥과 주색에 몰두 했기 때문에 늘 부왕으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해를 더할수록 세자의 어긋난 행동들이 잦아지자

태종은 급기야 1418년 6월 세자 제를 폐하고 도(세종)를 세자로  세웠다. 그로부터 2개월 뒤인 8월에

전격적으로 태종은 왕위를 세자 도(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자리로 물러났다. 세종은 왕위에

오르긴 했으나 재위 초기인 4년 동안 세종은 운신의 폭이 좁았다. 상왕 태종은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도 병권을 손에 쥐고 있었고, 그것은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태종은 대신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당시 최대의 실력자로 부상하고 있던 심온 형제들을 죽이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심온은 세종의 장인이자 영의정이었다. 그런 까닭에 세종에 왕비 심씨에 대한 폐비론이

대두되어 세종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즉위 초기에 혹독한 시험 무대를 거친 세종은 태종이

죽은 1422년부터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하여 정치, 사회, 과학 등의 전 분야에 걸치 일대 혁신을

시도하여 전례 없는 황금시대를 구가한다. 황희, 유관, 맹사성 등과 같은 노숙한 정치인들을 재상

으로 재상으로 포진시켜 정치적 안정을 이뤘고, 군사 문제에 밝은 최윤덕과 김종서를 앞세워 영토을

확장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였으며, 토지정책과 조세정책에 심혈을 기울여 농업을 혁신하고, 국가

재정, 국가 재정을 크게 늘렸다. 거기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조정에 학문 풍토를 조성하는 것은 물론 측우기를 비롯한 해시계, 물시계, 혼천의, 간의 등을 만들고 과학혁명을 일으켰으며, 스스로 언어학

에 몰두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기적 같은 일들을 벌였다. 이렇게 수많은 업적을 남긴 세종은 재위31년 6개얼 만인 1450년 2월 17일에 8번째아들 영응대군의 집에서 5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명나라 조정에서 시호를 장헌이라 하였고, 조선에서는 묘호를 세종으로 올렸다. 여기에 여러 시호와

존호가 추가되어 정식 칭호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이다



소감문

세종대왕은 이렇게나 훌륭한 인물이었음을 깨달았다.

세종대왕님은 먼저 백성들이 한자을 배우지 못해

여러 문제가 발생하자 한글 즉 훈민정음을 백성들에게

배포하였고 혼천의, 간의,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등

백성들의 도움을 주는 물건들을 만든 존경스러운 분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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