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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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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이태석'을 읽고
작성자 김강민 등록일 17.04.23 조회수 201

나는 누나가 이책을 읽기에 나도 한번 읽어 보았다. 이태석은 196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9살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홀어머니는 자갈치 시장에서 옷장사을 하며 부지런히 일하였다. 이태석은 어머니의 성품을 닮아, 남을 돕는 일을 좋아하였다. 1981년 부산 경남고등학교을 졸업한 후 인제대학교의과에 들어갔다. 1987년 대학교을 졸업한 후에 군의관으로 군 복무을 시작하였다. 복무 중 어느 날 전의 성당에서 황용연 신부을 만나 그는 오래동안 꿈꿔 왔던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1991년 8월 살레시오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이듬 해인 1992년 광주 가톨릭 대학교 신학 대학에 입학했다. 2년 뒤 1994년 1월 이태석은 살레시오에 수사가 되었다. 그리고 1997년 1월 이태석은 로마에 있는 살레시오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999년 8월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의 살레시오 수도원으로 향했다. 그 곳에서 제임스 신부을 만난 뒤 그가 이끄는 대로 남수단에 한 마을에 도착했다. 그곳은 계속된 전쟁으로 페허로 되어있었다. 또다른 곳으로 이동해 보았더니 그곳에는 한센병 환자들이 있었다. 이태석은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 사람들을 돕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이태석은 서울로 돌아와 2001년 6월 24일 그는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그 해 12월 그는 다시 아프리카 톤즈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병을 치료했다.그는 말라리아에 걸려가면서도 멀리 서 오는 환자들을 마다하지 않고 치료했다. 그는 전기가  없는 병원 지붕에 집광판을 설치하고 전기선을 연결했고 충전 컨트 롤러, 축전지, 인버터 등을 차례로 설치하여 넹장고를 작동시켰다. 그는 한센인 마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신발을 만들어 주어 한센인들과 하나가 되어갔다. 이태석 신부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학교을 짓기로 결심하였다. 처음에는 밖에서 공부했지만, 떙볕과 바람 때문에 공부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과 함께 모래을 나르고 벽돌을 찍으며 학교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전쟁으로 물든 곳에서 톤즈 아이들을 위해 음악을 가르치기로 결심했다.이 아이들 전부 다 악기을 처음 만져보는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꾸준히 연습을 하여 연주할수 있게 되었다. 브라스 밴드의 음악을 들은 사람들은 많은 감동을 느꼈다. 그러나 2008년 어느 여름날 새벽, 계속된 복통과 설사 때문에 자신에 몸에 이상이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검사을 받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갔고, 병원으로 간 그는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반복된 항암 치료 때문에 몸은 점점 야위어 갔지만 톤즈을 향한 그의 향한 마음은 점점 커져 갔다. 2010년 1월 14일 새벽, 그는 톤즈 아이들을 보지 못한 체 선종했다. 나는 이분의 이야기를 보면서 감동적인 생각이 들었다. 나도 꿈이 판사인데 나도 이태석 신부처럼 내 몸이 망가지더라도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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