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온누리(역사토론)

1. 명칭

 : 가온누리 ('세상의 중심에 서다' 라는 뜻을 가진 순 우리말)

2. 목적

: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로 알기위해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탐구한다.

3. 활동방향

① 역사탐방을 통한 역사의식 함양

② 역사와 관련된 자료를 통한 사고의 확대

③ 한국사 검정 능력시험 등의 다양한 활동을 통한 경험 습득

 

'순이 삼촌'을 읽고 <독후감>

이름 충주여자고등학교 등록일 10.07.30 조회수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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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 삼촌’을 읽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을 고를 때 제목을 통해 내용을 추측한다.
나 또한 제목이 마음에 드는 책에 손이 먼저 가게 된다.
그런데 ‘순이 삼촌’은 책의 내용을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선생님께서 양민학살 즉, 제주도 4.3사건을 배경으로 쓴 책을 말씀해주시기 전까지.
책을 다 읽은 후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변에 알던 사람이 죽는 다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큰 고통이라고 한다. 더군다나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죽었을 때 생존자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게 된다고 한다. 그 생존자가 바로 ‘순이 삼촌’이다.

책은 서울에서 자리 잡은 ‘나’가 할아버지 제사 때문에 8년 만에 고향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제사 때문에 한 자리에 모였지만 ‘나’의 눈에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 또한 ‘순이 삼촌’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나’와 함께 서울에서 나의 식모살이를 해주며 지내다 불연듯 내려간 새 죽은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을 둘러싸고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순이 삼촌은 약 1년 전부터 죽기 몇 달 전까지 ‘나’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해주었다. 그런데 순이 삼촌의 행동은 이상했다. 아무도 그러지 않았는데 밥을 많이 먹는 식모라며 뭐라고 했다고 한다던가, 부서진 생선을 가져다가 자기 탓이 아니라며 하나하나 해명하기까지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 것은 과거 제주도 4.3사건의 후유증으로 인한 환청 때문이었다.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순이 삼촌은 그 누구보다도 깊은 상처를 가슴에 안은 채 살아가게 된다. 그 날 이후 순이 삼촌은 경찰에 대한 심한 기피증이 생겼으며 메주콩 사건으로 인해 환청까지 겹쳐지게 된다. 평생을 그 날의 사건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순이 삼촌은 두 자식과 수 많은 마을 사람들이 뭍힌 옴팡 밭에서 사람의 뼈와 탄피 등을 골라내며 홀로 30년을 과부로 살아온다. 그러나 그 곳에서 그 날의 사건의 환청을 듣게 되고 바로 그 장소에서 독약을 먹고 자살을 하게 된다.

순이 삼촌은 원래 30년 전 그곳에서 총에 맞아 두 자식과 함께 죽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결국 그곳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순이 삼촌에게 그 동안의 세월은 무엇을 의미했던 것일까? 그리고 의미가 있었을까? 내가 순이 삼촌의 아픔을 이해하려고 하는 게 거만한 생각으로 여겨질 만큼 겪지 않은 나에게도 충격적이고 겪은 당사자는 말할 수 도 없는 아픔일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더욱 안타까웠던 것은 30년이 지난 그 때까지도 마을 사람 누구도 맘 편히 그 날의 사건을 고소할 수 없었고 자신들의 가슴 속에만 담아 두어야 했던 당시 시대 상황이었다. 이념의 대립이라는 것이 이렇게까지 무서운 것이었는지, 이렇게 극단적이었어야만 했었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순이’라는 이름은 너무나 평범하고 흔하고 순박한 이름이다. 그래서 순이 삼촌은 4.3사건 당시 상처를 가지고 있는 제주도 도민들 모두를 상징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순이 삼촌은 죽음을 택하였지만 아직도 제주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 날의 상처를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만의 생각 일 수도 있지만 작가는 이를 통해서 우리에게 강한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 같다. 잊지말아달라고.




◎ 제주4·3사건 [濟州四三事件]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제주도는 광복 후 일본군이 철수하고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인 6만여 명이 귀환하였으나 이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하여
생업을 영위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여기에 생필품 부족과 콜레라 발병으로 인한 수백 명의 인명 희생,
극심한 흉년 등이 겹친데가가 일제에 부역한 경찰들이 미군정하에서
다시 치안을 책임지는 군정경찰로 변신하고, 군정관리들이 사리를 채우는
부정행위를 일삼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7년 3·1절에 경찰이 시위하는 군중에게 발포하여
일반 주민이 사망 또는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를 계기로 남로당 제주도당은 반경(反警) 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한 결과,
제주도내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경찰의 발포에 항의하여 '3·10 총파업'에 동참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군정은 경찰의 과오를 다스리기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을 분쇄하는 데만
주력하여 제주도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를 전원 외지인으로 교체하고,
경찰과 우익단체인 서북청년단 단원들을 대거 동원하였다.

이로부터 4·3사건이 발발하기 전까지 약 1년간 2500여 명이 구금되고
테러와 고문이 자행되었다.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1948년 4월 3일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내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였다. 이들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무자비한 탄압을 중지하고,
남한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촉구하였다.
미군정은 경찰력과 서북청년단의 힘으로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자 경비대에 진압작전
출동명령을 내렸다.

경비대와 무장대는 한때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하는 데 합의하기도 하였으나
우익청년단체가 일으킨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무산되었다.
미군정은 지상과 공중에서 방화 현장을 입체적으로 촬영하여
《제주도의 메이데이 May Day on Cheju-do》라는 기록영화를 만들고,
이 사건을 무장대의 소행으로 조작하는 데 이용하였다.
1948년 5월 10일의 남한 단독선거에서 제주도는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되었고, 다음달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하려는 미군정의 시도도 수포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5월 20일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하여 무장대에 가담하였고,
6월 18일 경비대 연대장이 부하 대원에게 암살당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이후 잠시 소강 상태에 놓였으나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다음달 9일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문제를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그해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증파하였고,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에 앞서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하여 총살하겠가는
포고문이 발표되었고, 중산간마을에 대대적 진압작전이 실시되었다.

1948년 11월부터 중산간마을에 대한 강경진압으로 마을의 95% 이상이 불에 타 없어지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로 인하여 삶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마을 주민 2만 명 가량이
산으로 들어가 무장대의 일원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없는 경우에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하여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이른바 '대살(代殺)'을 자행하기도 하였으며,
재판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기도 하였다.
또한 세화·성읍·남원 등의 마을에서는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주민들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함께 선무작전이 병행되었으며, 귀순하면 용서한다는 사면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러진 데 이어
6월에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그리고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죽임을 당하였고,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이 사건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개방됨으로써
발발 이후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이 사건 이후 희생자 가족들은 죄의 유무에 관계없이
당시 군경토벌대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이른바 '빨갱이' 딱지가 붙어 피해를 대물림하였다.
이들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요청은 무시되어오다가
2000년 1월 12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그해 8월 28일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발족하여 진상조사에 착수하였다.

위원회는 진상조사 결과, 제주4·3사건을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하였다.
또 이 사건의 희생자 통계는 확실하지 않지만 2만 5000~3만 명으로 잠정 추정하였다.
한편, 군인 전사자는 180명 내외, 경찰 전사자는 140명이며,
당시 희생된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 회원들은 국가유공자로
정부의 보훈 대상자가 되었다.

2003년 10월 31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진상조사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와 토벌대의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국가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고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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