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학년 1반

언제나 배려하고 모두를 사랑하고 뭐든지 노력하는 배사노 5기 여러분 환영해요^^

언제나 행복한 배사노 5기♡
  • 선생님 : 정택규
  • 학생수 : 남 14명 / 여 12명

몽골의 고려 침략과 고려의 저항

이름 문서연 등록일 15.12.24 조회수 9
몽골의 5차침입 본문 이미지 1

몽골의 5차 침략의 전개

1251년(고종38) 7월에 개최된 코릴타(Khurilta)에서는 바토(바투,Batu)의 지지를 받은 톨로이(톨루이, Tolui)의 아들 멍케(몽가, , Möngke)가 황제에 선임된다. 몽골의 헌종 멍케는 즉위 즉시 고려에 사신을 파견, 고종의 친조()와 개경에의 환도()를 촉구했다.
예구(야굴, , Yegü)에 의한 몽골의 제5차 고려 침입이 개시된 것은 1253년(고종40) 7월의 일이다. 예구가 4차 침략을 지휘했던 아모간(, Amugan)과 홍복원을 5차 침략에 대동한 걸 보면, 5차 침략군의 주력은 4차 침략을 담당했던 아모간과 홍복원 휘하 병력이었던 것 같다. 이들 몽골군의 1대는 7월 15일 대동강 하마탄()을 건너 동북변경()의 고화주(, 영흥)지역으로 향했다. 강도()정부는 몽골군의 내침에 대비해 갑곶강()에서 수전()을 연습함으로써 강도 방어를 강화했다.
5차 침략의 몽골군은 1253년 7월부터 고려 침공을 시작해 이듬해 1월 일단 철수했다. 당시 몽골군의 내침 경로는 압록강을 건너 서해도로 남하한 종래의 경우와 함께, 동계()로부터 진입하는 양면 침략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몽골의 5차침입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삼별초), 2005., 한국콘텐츠진흥원)

고려의 저항(처인성 전투)

■ 끝까지 싸우리라

고려 정부가 강화도로 피신을 가자 몽골은 더욱 거세게 고려를 공격하였고, 닥치는 대로 부수고 불태우고 사람들을 끌고 갔다. 한 해에만 고려 인구의 거의 1/10에 이르는 20만여 명이 몽골에 끌려가기도 하였고, 강원도 춘천에서는 성을 지키려고 한 300여 명이 끔찍한 주검으로 발견되기도 하였다.

비록 몽골에 밀리는 처지였지만 고려의 저항은 끈질겼다. 1차 침입 때 몽골은 평안도 귀주성을 공격하였다. 포차를 동원하여 성벽을 파괴하고, 성벽에 구멍을 뚫고 마른 풀을 쌓아 불을 지르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다. 하지만 고려군의 저항이 강력하여 별 성과가 없자 몽골은 귀주성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말 머리를 돌렸다. 이때 몽골군 장수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내 평생에 이렇게 거세게 저항하는 군대는 처음이다."

2차 침입 때에도 빛나는 싸움이 있었다. 총사령관 살리타가 이끄는 몽골 부대가 처인성(경기도 용인)을 거쳐 충청도로 내달릴 참이었다. 살리타는 처인성을 야트막한 흙성에 불과하다며 가벼이 여겼다가 그곳에서 날아온 화살을 맞고 죽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고려 사람들은 세계를 누비며 호령하던 몽골 최고의 장수를 쓰러뜨려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1232)

처인성 전투

처인성 전투처인성은 흙성인 데다 그다지 높지 않아 작은 동산과 같았다. 이 성에서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이 몽골군을 격퇴, 고려는 역사에 남을 큰 승리를 거두었다.

■ 전쟁 속에 누린 평화

몽골에 맞선 싸움은 고려의 운명을 건 승부였다. 이 중요한 싸움은 당연히 왕과 최씨 정권이 앞장서고 민중이 단결된 모습으로 함께할 때 더욱 힘을 떨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배층이 제 몫을 하지 못하였다. 강화도로 피신하면서 최씨 정권이 민중에게 한 말은 고작 산이나 섬으로 가 알아서 숨으라는 것이었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중앙에서 출동한 군대가 몽골군과 정면 대결을 벌인 적은 거의 없었다.

고려의 지배층은 그저 강화도에 피신해 있을 뿐이었다. 강화도는 뱃길로 육지와 쉽게 연결되므로 세금을 걷는 데 지장이 없었고, 잘 훈련된 호위병들이 지켜 주는 가운데 개경 못지않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다음은 그들이 저버린 육지의 민중이 맨몸으로 몽골군과 싸우던 시절의 한 모습이다.

최우가 자기 집안사람과 신하들을 불러 잔치를 열었는데, 비단으로 산더미같이 장막을 만들고 가운데에 그네를 매었다. 온갖 꽃으로 장식하고 은 단추와 자개를 붙였다. …… 이윽고 악공들이 호화롭게 단장하고 풍악을 연주하니 거문고, 북, 피리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최우는 악공에게 은 덩어리를 주고, 기생·광대들에게도 비단을 내려 주었다. 그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들었다.
- 《고려사절요》, 고종 33년 5월

[네이버 지식백과] 몽골과 맞선 고려 사람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2012. 4. 9., 휴머니스트)

이전글 방학숙제
다음글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