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3반

안녕하세요. 여러분! 항상 건강하고 밝은 우리반 학생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선생님 : 김영선
  • 학생수 : 남 13명 / 여 7명

경복궁 자료(4~6학년) 함께 가는 곳이라 6학년 자료지만 참고로 올려봅니다.

이름 김영선 등록일 11.04.21 조회수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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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학년도 6학년 현장 학습 자료

        역사가 숨쉬는 고궁과

    현대의 도시 발전을 한 눈으로!

                 누가 : 석교초등학교 6학년

            언제 : 2011년 4월 22일 (금)

            어디 : 서울 경복궁



경복궁은 조선 시대에 지어진 5개의 궁 가운데 으뜸이 되는 정궁이다. 이 궁은 1392년에 조선의 개창자인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을 떠나 서울을 새로운 나라의 터전으로 잡은 후 새 왕조의 궁전으로 1395년에 지은 것이다. 당시 한양으로의 천도는 태조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개경은 고려의 신하였던 구세력들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인지라 서울은 조선왕조의 새로운 기반이었고, 경복궁은 중요한 만큼 심혈을 기울여 터를 정하고 지은 것이다. 이렇게 지어진 경복궁의 역사는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1553년 대화제로 불에 타고 , 다시 임진왜란(1592)때 방화로 타버린 경복궁은 그후 250년 가량이나 버려진 채 있었다. 경복궁이 이처럼 버려진 채 있었던 것은 역대의 많은 왕들이 복구 의지는 있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렇게 버려져 있던 것을 1865년 고종이 왕이 되면서 권력을 잡게된 그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이 외세에 의해 무너져 가던 나라의 기강과 왕조의 복구를 기도하며 막대한 돈을 들여 다시 지어지게 된다. 당시 흥선 대원군의 공사가 망해가는 왕조의 무리수 였는지도 모르지만 무너져 가던 왕조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던 흥선 대원군의 굳건한 의지가 담긴 공사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이렇게 해서 1869년에 완성된 경복궁은 궁안에 지어진 전에 건물이 무려 7,225칸에 달하였고 궁 밖에도 따로 489칸이 있는 큰 규모가 되

  배산임수(背山臨水). 집 뒤에 산이 있고 앞에는 물이 흐른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집자리로서 가장 이상적인 공간 배치이다.

  서울은 풍수 지리에서 빼어난 땅으로 알려져 있고 그 가운데 가장 좋은 땅을 골라 지은 것이 바로 경복궁이다. 그러나 경복궁도 모자란 점이 있었다. 바로 명당수가 모자란 점이다. 이를 보완하기 이해 궁궐 서북쪽 물을 끌어들여 만든 것이 금천이다. 금천은 물만이 아니라 북악산 정기를 궁 안으로 끌어오는 구실도 하였다.

  금천은 명당에 들어오는 잡귀를 막는 구실도 하였다. 마치 적군을 막기 위해 성 주위에 목책을 두르거나 해자를 파듯이 말이다. 또한 이곳이 왕이 사는 성스러운 명당임을 알리는 구실도 하였다.

  영제교를 건너다가 좌우를 살펴보면 도랑 축대 사방에 엎드려 있는 동물상이 눈에 뛴다. 온몸이 비늘로 덮여 있고, 정수리에 뿔이 하나 있는데, 네 마리 모두가 도랑 바닥을 뚫어져라 감시하고 있는 모습이다. 금천으로 밖에서 들어오는 사악한 기운을 막아도 '다리'로 들어오는 잡귀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금천 위에 놓인 영제교 난간과 개천가에 흥례문과 금천을 노려보고 있는 영험한 동물들을 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품계석

  남쪽의 근정문에서부터 근정전 계단까지 요즘으로 말하면 3차선으로 된 길이 나 있다. 이 길 좌우에는 돌로 깎아 만든 묘비 같은 것들이 사열해 있다. 이름하여 품계석이다.

  품계석은 서있는 위치와 방향에 따라 직분이나 직위의 높낮이가 정해져 있다. 각 품계석에는 정일품으로부터 종구품에 이르는 품계의 이

중건당시(대원군) 근정전 행각이 1칸이었던 것에서 2칸으로 넓어진다. 2칸이 된 동서 쪽 행각에서 마당 쪽 칸은 통로(복도)로 이용되었다. 벽 쪽에는 창고와 사무실, 다락방 등 여러 시설을 두었다.

근정전

  정면이 5간, 측면이 5간 해서 25간이나 되는 근정전은 상․하 월대 위에 이층으로 지은 거대한 건물이다. 건물 내부는 아래 위층의 구분을 없이하여 넓고 높은 건물로, 현존하는 최대의 목조건물이다.

  이성석축기단(二成石築基壇) 위에 세워졌으며, 정면 5칸(30 m). 측면 5칸(21 m)의 중층팔작(重層八作) 지붕의 큰 직사각형 건물이다.

  건물 내부에는 10개의 높은 기둥을 정면으로 4개, 측면으로 3개씩을 세워 천장을 받들게 함과 동시에 궁전 안을 중앙부의 내진(內陣)과 주위를 도는 외진(外陣)으로 구분하는 역할을 겸하게 했다.

  전체적으로 장식적 의장(意匠)을 마음껏 담고 있어, 다소 과식(過飾)의 감이 있기는 하나 조선 말기 건축의 정수라 할 수 있고, 당시 건축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표본적 건물이다.

  중앙의 한길 가운데 높은 단의 의자 이것이 용상이다. 용상뒤 세폭

으로 지어졌고 아래, 윗층의 크기가 같다. 받침이 되는 바닥돌 기단 위에 육각형의 주춧돌이 있고, 그 위에 1,2층을 꿰뚫는 여섯 기둥을 세웠다. 향원정은 각 칸마다 예쁜 나무살창들을 달아 멋을 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육각형의 지붕으로 올라가서 가운데 꼭대기에 추녀마루들이 모이는 곳에 절병통을 얹어 치장하였다.




국립민속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은 옛 궁궐인 경복궁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왕조의 문화와 전통민속 생활 문화를 함께 접할 수 있는 서민문화가 생동하는 문화의 우물터로서, 민속문화의 연구․ 수집 ․ 보존과 문화교육 및 생활문화 전시로 전통문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통한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 울 수 있는 사회교육 현장이며, 전통과 현대가 어우른 문화의 전당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의 건물 형태 구성을 보면 전면 중앙은 조형성이 뛰어난 불국사의 청운교․백운교 형태를 본떠 만들었으며, 전면 가운데 보이는 5층탑 건물은 법주사 팔상전을, 동편 3층 건물은 금산사 미륵전을, 왼편의 2층 건물은 화엄사 각황전을 본떠 우리 나라의 전통 건축양식을 재현한 것입니다.


경연

  나라에 중대사가 발생했을 때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왕과 신하가 만나 함께 공부를 하면서 국정을 의논하기도 하였다. 이를 경연이라 한다. 왕이 바른 품성과 올바른 국정을 행할 수 있게 도와주는 구실을 하였다. 경연은 해가 뜰 무렵인 식전에 주로 이루어 졌다. 경연의 횟수는 왕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세종은 즉위한 뒤 약 20년 동안 날마다 경연에 참석했으며, 성종은 재위 25년 동안 날마다 세 번씩 경연에 참석하였다. 세조와 연산군은 참석은 커녕 아예 경연을 폐지해 버렸다.





경회루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의 경회루는 작은 누각에 지나지 않았다. 1412년 그 건물이 기울자 이를 수리하면서 위치를 서쪽으로 옮기고, 원래보다 크기도 크게 하였으며 땅이 습한 것을 염려하여 둘레에 못을 박았다. 새 건물이 완공될 때 태종은 종친, 공신, 원로 대신들을 불러 기뻐하며 경회루라는 이름을 지었다. 경회는 경사가 모이기만을 바라는 뜻이 아니라. 올바른 사람을 얻어야만 경회라고 할 수 있다는 뜻에서 왕과 신하가 덕으로써 서로 만난 것을 말한다.

  1473년 4년 성종 때 아래층 돌기둥에 용을 조각하였다. 연산군은 경회루 연못 서편에 만세산을 쌓고, 연못에 배를 띄워 흥청망청 놀기도 하였다.

  경회루는 임진왜란에 불탔다.오늘날 경회루는 1867년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다시 지은 것이다.

  경회루는 정면 7간, 측면 5간 해서 35간이나 된다. 이층 누마루집인데 아래층은 돌기둥을 세우고 위층은 나무로 지었다.  지붕은 앞 뒤

지붕면이 높이 솟아오르고 옆 지붕은 중간에 가서 붙고 그 윗부분은 삼각형의 단면이 생기는 팔작지붕 형식이다.

  정상은 용마루를 쌓고 그 양끝은 새가 입을 벌리고 있는 모양이나 새의 꼬리 모양을 흙으로 구워 설치한다. 추녀마루의 시작 부위에는 용의 머리 용두를 놓는다. 추녀마루 끝에는 짐승모양을 얹었다. 잡상이라 한다.

  경회루는 경복궁의 내전인 강녕전과 교태전에서 들어가는 것이 정식 경로로,  경복궁 내전에 딸린 누각이요 정원으로 내전에 살던 왕과 왕실의 전용이었다.

 




동궁

  세자를 동궁(東宮)이라 하였다. 오행에 따르면 봄은 동쪽이다. 이 때문에 왕이 거처하는 곳 동쪽에 세자궁을 만들었다. 세자궁을 동궁 또는 춘궁(春宮)이라고 한 것도, 세자 책봉을 봄에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동궁에는 자선당과 비현각이라는 두 건물이 있다. 자선당은 세자의 공식 활동공간이며, 세자와 세자빈이 살던 집이다. 비현각은 그 부속건물이며 세자가 공부를 하던 곳이다. 그 비현각 주위에는 세자를 교육

하고 보필하는 업무를 맡았던 세자시강원(춘방)과 세자를 경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세자익위사(계방)이라고 하는 관서 등이 있다. 그 일대는 광화문에서 교태전으로 이어지는 경복궁의 중심축, 왕이 계시는 내전의 동쪽에 해당된다. 이곳이 동궁이다.

  동궁은 경복궁 궁궐 밖에 있던 것을 세조 연간에 경복궁 안으로 끌어들이었다. 여기서 왕들은 왕자 수업을 받고 왕이 되었다.

  동궁은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 없어질 때 함께 없어지고 말았다. 270여 년 동안 세자들은 동궐(창덕궁과 창경궁)이나 서궐 경희궁의 동궁에서 생활하였다.





향원

  향원지는 내전 뒤편에 있는 후원으로서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물 위의 비치는 향원정의 그림자는 환상적이다. 이 향원지는 장엄한 경회루와 달리 대체로 아늑하고 아담한 분위기가 묻어난다. 향원지는 네모나고 가운데 있는 섬은 둥그렇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져 있다는 동양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네모난 땅을 상징하는 연못은 둘레가 네모나게 파져 있고 하늘을 상징하는 섬은 둥글게 만들어져 있다.

  향원정은 2층의 정자이다. 이 건물은 정육각형

의 나무 병풍 삼곡병이 용상을 옹위하고 있다. 물결치는 바다, 소나무, 대나무가 우거진 사이에 기암괴석이 들어서 있다.

  다섯봉우리와 폭포가 떨어지고 있다. 해와 달, 일월오악병이 놓여 있다. 그 위로는 조각을 더욱 정교하게 한 나무로 된 지붕 모양의 닫집이 설치되어 있다. 왕의 존엄을 드러내기 위한 갖가지 상징들이 베풀어져 있다.

  근정전 행사 때 예절에 어긋안 행동을 하면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  제사, 원릉 참배 및 조회 때에 예절에 어긋난 자와 관복을 제대로 갖추어 입지 않은 자는 월급 1/2를 깎는다. 이를 살펴야 할 담당 관리가 적발하지 못하면 똑같은 처벌을 받는다.





사정전

  사정전은 왕이 아침에 출근하여 저녁에 퇴근할 동안 일상적인 업무를 보는 곳이다. 왕이 정무를 보는 것을 시사라고 한다. 시사에는 날마다 업무 보고를 받는 아침 조회같은 성격을 띠는 상참이 있고, 한 달에 정규적으로 갖는 회의인 차대, 조참 및 비정규적인 회의 등이 있었다.

  시사만이 아니라 사정전은 왕과 신하가 나라 일을 의논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 때는 사정전 좌우에 있는 만춘전과 천추전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사정전은 온돌방이 없지만 두 건물에는 마루방과 온돌방이 있어 더 편하게 국정을 의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정전은 왕이 외국 사신을 맞이하거나, 우리 사신을 외국으로 보낼 때 하직 인사를 받던 곳이기도 하며, 한양으로 돌아온 지방관을 맞아 그 지방의 소식도 듣고, 멀리 파견되는 지방관과 장수들을 격려하고 친히 당부하는 곳이기도 하다.

63빌딩

  63빌딩의 높이는 해발 264m, 지상고 249m로 해발 265m인 남산 보다 1m가 낮다. 지하 3층, 지상 60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시계반경이 50km인 60층 전망대에 오르면 서울의 도심을 한 눈에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쾌청한 날이면 인천 앞바다까지 볼 수 있다.

  63빌딩의 정상 60층에 위치한 전망대는 시계 반경이 무려 50km 이상으로 서울도심은 물론 쾌청한 날에는 멀리 인천 앞바다까지 바라볼 수 있다. 63전망대에 오르는 투명한 관광엘리베이터는 고도에 따라 변하는 전망을 볼 수 있어 마치 비행기를 탄 느낌을 갖게 한다. 또한 세계 어느 전망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신비한 만화경, 신비의 소리 등의 흥미로운 체험 시설물을 설치함으로써 기상조건에 관계없이 관람객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미래형 전망대이다.

  63씨월드는 지하1층 453평, 지하2층 470평, 전용 기계실인 지하3층, 55평을 합쳐 총 1,078평에 이릅니다. 기본 전시수조 54개와 어린 특수생물 사육용 저수조 26개에는 총 400여종, 2만여 마리의 다양한 해양 생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여성다이버가 인어공주쇼를 펼치고 있는 대회유수조는 저수용량 200t 규모로 엄청난 수압 때문에 수조의 투명아크릴 두께만도 20cm나 됩니다. 전시장 뒤에는 바다생물들의 질병을 연구하는 어병연구설비, 플랑크톤을 배양하는 이료배양설비, 인공 부화설비를 비롯, 용존 산소량과 수소이온농도, 질산염, 인산 등을 조사하는 수질 분석설비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특수 박테리아를 이용한 생물학적 수질 정화법과 각 수조마다 단독으로 장치된 순환 여과시스템으로 저마다의 환경을 조절한다.


<메모>




름이 각각 씌어 있는데, 어좌에 가까울수록 품계가 높아지고, 멀수록 품계가 낮아지게 되어있다. 그리고 임금의 어좌에서 볼 때 왼쪽에 있는 것이 문반의 품계석이고, 오른쪽에 있는 것이 무반의 품계석이다.

  궁중에서 조회나 연회가 있을 때면 문.무반 관료들은 근정문 밖 영제교 남쪽에 일단 정렬하게 된다. 문반은 동쪽에, 무반은 서쪽에 형식을 갖춰 도열해 있다가 준비가 되면 정리(庭吏)의 안내를 받아 문 안으로 들어와 각기 자기 위치를 찾아 도열한다.

  이 때 문반은 동쪽의 일화문으로 들어가고, 무반은 서쪽의 일화문으로 들어간다. 음양으로 볼 때 문은 태양이고 무는 달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행각

  대원군 당시 중건한 경복궁 회랑은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뻥 뚫린 복도 같은 구조가 있는 회랑이 아니라 사무실, 창고 등이 있었던 행각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경복궁을 처음 만들었을 때에도 회랑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어렵사리 지은 궁궐은 얼마 사용하지도 못하고 다시 아픈 역사를 밝아야 했다. 식민주의 정책을 펴고 있던 외세의 세력들에 비해 너무나 국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은 1904년 조선을 완전히 자신의 속국으로 삼았고,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의 전각들을 하나 둘 부숴 뜨리기 시작했다. 특히 1926년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 앞에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짓고, 이듬해에 정문인 광화문을 치워버림으로써 경복궁은 완전히 제모습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광복 후에도 이 청사는 사라지지 않고 1992년까지 무려 반백년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지금 경복궁은 대부분이 보수 공사 중이다. 나라의 혼란으로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궁궐로서의 제 모습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경복궁 복원의 원형은 고종 연간에 중건된 모습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한다. 경복궁은 한 나라의 정궁이니 반드시 제모습을 찾아야 할 것이다.




광화문

  조선조의 태조 때(1395년)창건, 무사암을 사용, 석축 홍예문(무지개모양의 문)을 쌓고 그 위에 3간 2면의 중층 문루를 세운 궁문이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함께 왜병에 의해 소실되었던 것을 270여년 만인 대원군 때에 원래에 모습으로 중건했었다. 그러나 한일합방 후 일본 총독부가 경복궁 안에 총독부 청사를 지은 다음 해인 1927년에 총독부 청사가 가린다고 해서 이를 헐어냈다.     현재의 광화문은 1968년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운 콘크리트조 건물이다. 그래서 5대 궁궐의 문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이 궁문은 철근 콘크리지트로 흉내만 내어져 국보도 보물도 아니고 지방문화재에도 들지 못하고 있다.(또한 13미터 가량 뒤쪽에 밀려나있고 방향도 관악산이 아닌 남산을 바라본 3.5도의 축이 벗어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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