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대첩은 이 일대의 여러 차례 전투를 합하여 일컫는 이다. 청산리 대첩이 일어났던 그해 10월 20일, 일본군이 화룡현 삼도구로부터 청산리 골짜기로 침입해 온다는 첩보를 듣고, 대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 장군은 지형상 일본군 주력 부대가 백운평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기때문에 백운평 일대의 고지마다 독립군을 이중 매복시키고 일본군을 기다렸다. 10월 21일 일본 전위부대은 독립군이 매복하고 있는 줄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이 계곡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이때를 기다리던 독립군들은 일본 전위부대가 가까이오자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였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안되서 독립군은 일본 전위부대를 물리쳤다. 전위부대에 이어 일본 주력부대가 전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기관총과 포를 앞세우고 돌격해 왔다. 하지만 좋은지형을 차지한 독립군의 방어에 일본군은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이 청산리대첩은 1920년 10월 21일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10월 26일까지 천수평·어랑촌·완루구·고동하 등지에서 크고 작은 10여 차례의 전투를 벌여 우리 독립군이 모두 승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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