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1반

안녕하세요. 여러분! 항상 건강하고 밝은 우리반 학생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선생님 : 손왕석
  • 학생수 : 남 0명 / 여 0명

문백면

이름 백지훈 등록일 16.04.05 조회수 7

문백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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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성리 (玉城里)
  • 옥산(玉山)마을

    옥산마을을 오미라고 한다. 오미는 약 360여년전에 조선 중엽(中葉) 진주 이씨가 정착하였고 그 후 역촌이라 하여 이 곳에서 오고 가는 길손과 역부들이 점심 참을 대었고, 염소국에 점심을 잘 먹었다고하여 점심오(午)자 양미(未)자를 써서 오미라 하였다. 그 후 행정구역 개편시 마을 옆에 옥과 같은 산이 있다고 하여 옥산(玉山)이라 칭하였다 한다. 또 한 설(設)은 지형상으로 어미알이 누어있는 형국으로 오메라 하였든것이 오미로 변하였다는 설도 있다. 오미란 순수한 우리말이며 평지보다 조금 얕고 수초(水草)가 나고 또 물이 늘 고여 있는 곳을 말한다. 오미란 동명이나 지명은 전국에도 많이 있다.

  • 바사리

    바사리는 문백면 옛 소재지를 말한다. 원은 마살리(馬殺里)라 한다. 여기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말을 죽이어 마살리라 하였는데 그 후 바사리로 변하였다는 것이다. 또 한 설은 지형이 말의 바를 사리어 놓은 형국으로 바사리라고 하는 설도 있다. 따라서 오미마을은 오메말, 갈마지(渴馬池)마을은 목마른 망아지의 형국이라고 한다.
    파재-두성(豆城)마을 두성마을을 파재(芭城)라고 한다. 성(城)안이 파초(芭焦)잎과 같이 생겨 파재라고 하였다. 일정시대에 토지 측량을 하고 팥두(豆)자를 써서 두성(豆城)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마땅히 파성(芭城)으로 부르는 것이 옳을상 싶다. 파재는 삼국시대에 구축한 것으로 추정되는 토성의 흔적이 있고 동네안에 절샘과 절터가 있어 지금도 기와조각이 나온다. 마을 10여호에 문화류씨(文化柳氏)가 대성을 이루고 있으며 류희원(柳希源)선생의 효자 정문(旌門)이 있다. 동네 앞산을 차일봉(遮日峰)이라 하는데 양천산(350m) 내맥(來脈)이 뻗치어서 이루어진 산으로 그 모양이 차일(遮日)을 쳐 놓은 것 같이 생겨 차일봉이라 하는데 이런 예는 전국 도처에 많이 있다.
    예(例)를 들면

    1. ① 함경남도 풍산군과 신흥군 사이에 있는 산. 높이 2,508m
    2. ② 함경남도 정평군과 평양남도 영원군 사이에 있는 산. 높이 1,742m
    3. ③ 함경남도 북천군에 있는 산. 높이 1,663m
    4. ④ 금강산에 있는 봉우리. 높이 1,529m

    이 마을은 한때 피난곳이라 이름이 났으나 6ㆍ25격전지로 유명하며 호되게 혼이 난 곳이기도 하다.

  • 능골(陵洞)

    능과 같은 큰 무덤이 있어 능골이라 전한다. 이 무덤은 누구의 무덤인지 아직 확인이 되고 있지 않다. 마을어구에는 옛 절터가 있으며 축대가 소롯이 남아 있다.

  • 말부리고개

    문백면 소재지에서 진천으로 오는 첫고개를 말부리 고개라고 한다. 우암 (尤庵) 송 시열(宋時烈) 선생께서 말을 타고 이 고개에 이르러 잠시 쉬게 되었다. 고개마루에 마침 바위가 두개 있었다. (지금도 있지만) 우암이 타고온 말을 가리키며 "이 바위는 네 불랄 같구나." 하였다. 그 후 말부랄고개가 말부리고개로 변하였다 하며 이 고개에서 산세를 관망하시고 송강(松江) 정 철(鄭澈) 선생의 묘소를 잡았다 한다.

봉죽리 (鳳竹里)
  • 어은(漁隱)마을

    어은마을을 은골이라 한다. 우암 송시열 선생께서 송강 정 철 선생의 묘지를 정할 때 이곳 지형을 보고 어은지형(漁隱之形)이라 하였다 한다. 즉 고기가 숨어 있는 형국이라 하여 고기어(漁)자 숨을은(隱)자를 써서 어은이라 한다. 환희산(歡喜山) 아래 어은동이 있고, 송강(松江) 정 철(鄭澈) 선생의 산소와 사당(祠堂) 과 신도비(神道碑) 와 시비(詩碑)가 있으며, 전시관에는 유품(遺品)으로 은배, 옥배, 친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송 강 선생은 영의정(領議政)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시문청공(諡文淸公…글을 좋아하고, 맑고 깨끗한 선비)으로서 선조조 당시에 정치 문학 방면에 활약하였으며, 정치방면에는 당쟁의 소란한 와중(渦中)에서 많은 파란을 겪었지만은 문학방면에는 가사문학의 대성으로서 우리 나라의 시신(詩神)으로 추앙을 받고 있을뿐아니라 시성(詩聖)이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그가 남긴 가사에는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 성산별곡(星山別曲), 장진주사, 시조 70여수 유고(遺稿…죽은 뒤에 끼친 원고)로 송강가사 가 있으며, 우리 국문학사상 찬연(燦然)히 불후(不朽)의 빛을 남기고 있다. 가사 내용을 훑어 보면 선생은 항상 국가와 민족을 위하고, 부모에 대한 효행을 기록 하고있으며, 지금 우리 사회에 양심마저 퇴색되고, 변질되어가는 이 마당에 우리의 귀감이 되지 않을 수 없으며, 송강사우를 찾는 인사들이 늘 꼬리를 물고 있다. 은골마을은 송강사우의 성역화(聖域化) 사업(1979년)에 따라 근 20여호 가구가 동구밖에 새 터전을 마련하고 문화주택을 건설하여 이주하였다.

  • 봉암(鳳岩)마을

    봉암마을은 서기 1683년에 이 동네에서 출생한 채 지홍(蔡之洪) 선생이 봉암(鳳岩) 이라 자호하고, 거실을 봉암정사 라고 한데서 비롯되었다. 그는 재능과 지혜가 출중하여 8세에 이미 한시를 지어 세인을 놀라게 하였고, 성리학(性理學) 으로 이름이 높았다. 한때 충청도 도사(都事)도 지냈으며 그의 저서에는 성리관규(性理管規), 세심요결(洗心要訣), 독서진보 등과 많은 한시를 남기었고, 후배 교육에 힘써왔다. 어은팔경시(魚隱八景詩) 도 그의 작품이다. 그가 죽은 후 지방 유림들이 그를 모시는 사우(祠宇)를 세우고 봉암향현사(鳳岩鄕賢祠) 라 칭하였으며, 후배 교육의 도장으로 삼았다. 봉암동네 옆에 문백 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근 70여호 가구에 마씨(馬氏), 김씨, 조씨(曺氏) 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계산리 (溪山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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