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1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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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생님 : 손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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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을 빛낸위인

이름 백지훈 등록일 16.04.04 조회수 7

송인은 고려 인종 서기 1125년에 덕산면 두촌리 두루지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벼슬이 삼중 대광문하 평장사에 이르렀다. 평장사는 고려시대에 가장 높은 벼슬이다.

 

고려 인종 임금때에 나라에 많은 공을 세웠기 찬화공신에 기록되었고 그 공을 높이 치하하여 진천백을 봉하였다. 백이 되면 그 고을의 행정 사법 경제등을 맡아서 정치를 하였으며 그 지역에서 나오는 세금으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부유하게 지낼 수가 있었다.

 

나라에서 진천백을 봉하였기 때문에 본관을 진천으로 하였으니 진천 송씨는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상산백으로 있을 때에 군민의 복지증진을 위하여 모든 행정을 송정하게 처리하였기에 군민들은 평화롭게 지내게 되었다. 또 군내 청소년의 교육에 힘을 썼기에 어디를 가던지 글을 읽는 소리가 명랑하게 들리어 왔다. 그 뿐인가 예의를 존종하였기에 군민들은 예의바른 생활을 하였으므로 다른 군에서는 모방할래야 할수 없는 모범을 보였다. 그 후 군민들은 공의 공로를 높이 치하하게 되었다.

 

묘소는 덕산면 두촌리에 있다. 옛날에는 산정면 두루지라 하였다. 좌향은 갑좌경향이다. 묘소의 변천된 모습을 보면 신라시대에는 매우 커서 큰 산봉우리만 하였다. 조선 시대의 분묘는 신라시대보다 훨씬 적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분묘는 조선시대보다 훨씬 적었다. 이렇게 묘소를 만든 것이 특징이다.

 

묘소에 가서 보면 뒤에 아름다운 봉우리가 솟아 있으니 비봉산이라고 한다. 하늘에 살고 있다는 봉새가 날아와서 앉아 있는 모습이라 하여 지은 이름이다.

 

그러나 진천 송씨의 시조 인 공의 묘를 쓴후 그 형국이 "매화낙지형" 즉 매화가 땅에 떨어져서 조용히 있는 모습이라 하였다. 그러기에 비봉산을 매산 매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매"는 새이름의 매가 아니오 매화의 매를 글자로 썼다.

 

공신이요 상산백을 지냈고, 벼슬이 평장사에 이르렀기에 나라의 명령에 의하여 봉분주위를 돌로 쌓았고, 묘갈이 있다. 분묘중에서 진천에서는 오래 된 분묘이며 환여승람에는 석총에 기록되어 있다.

 

진천 송씨는 공을 시조로 하여 현재 수천호가 남한각지에 거주하고 있다.

 

고려에 몽고병이 침입하였을 때 많은 공을 세운 송 국첨, 송 언기는 진천백의 후손이다.

 

2.임연

 

임연 장군은 몽고가 고려를 침략하였을 때 목숨이 다하도록 항거하여 고려 무인의 민족적 자주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유명한 분으로 진천 구곡리에서 태어났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용모가 특이했는데 불쑥 튀어나온 두 눈이 화경같이 빛났고 우렁찬 목소리는 호랑이를 제압했으며, 대들보감의 통나무를 지붕 위로 쉽게 던진 장사였고, 행동 또한 민첩하여 인근 마을에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당시 고려 조정을 지탱해온 대장군 송 언상이 향지에 내려왔다가 임 연의 특이한 용모와 재주를 보고 크게 될 인물이라 단정하고 그룰 개경의 집으로 데려가 문무의 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송 언상이 병들어 죽자 다시 고향에 내려와 홀로 학문과 무예를 연마하여 후일 고려 조정을 떠받칠 힘을 길렀다.

 

그 무렵 고려는 몽고의 수차에 걸친 침입을 받아 조정은 강화도로 피난하고 곳곳의 백성들은 몽고병의 횡포에 살 곳을 잃고 흩어져 갖은 고생을 하였다. 고종21년 진천 지방에도 몽고병이 나타나 행패를 부린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장군은 "나라가 위급할 때 나라와 백성을 위해 힘을 쓰지 않으면 어찌 대장부라 하리오." 하는 굳은 결심을 갖고 지방의 청년들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여 분연히 몽고병과의 싸움에 나섰다.

 

장군은 날쌘 군사 10여명을 뽑아 적병이 진을 치고 있는 동호들(지금의 덕문리)로 적정을 살피기 위한 정탐을 보냈다. 정탐을 하고 돌아온 군사들은 제각기 적정을 보고했는데 "장군! 차마 눈뜨고 못 볼 일들이 적진에 일어나고 있었소. 우리의 부녀자들이 적병에게 희롱을 당함은 물론 놈들은 탈취해온 가축을 잡고, 남자들을 짐승 부리듯 하니......" 하고 몽고병의 행패를 보고하는가 하면 "장군! 놈들은 연전연승한 축배를 들고 파수꾼마져 술이 취하여 군기가 엉망이오." 하는 보고도 있었다. "음... 수고들 했다. 적병의 수효는 얼마나 되며 진영은 몇 개로 나뉘어져 있더냐?" "네 , 적병의 수효는 어림잡아 수백이었는데, 진영은 본진을 합쳐 15곳이 되었습니다. 놈들은 진영 부근에 기마군으로 순찰을 하고 있는데 그놈들 역시 술이 취해 고려의 여인을 희롱하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하는 보고를 받았다. 장군은 수하 조장들을 불러 엄밀히 군령을 내렸다. "1군은 마른 섶을 준비하여 우마에 싣고, 2군은 징과 괭과리를 준비할 것이며, 3군은 화살에 기름먹인 솜방망이를 준비하고, 다른 제군은 창검으로 무장한 뒤 나를 따르라." 장군을 따르는 120의 병사들은 죽음을 각오한채 칠흙같은 어둠을 헤치며 동호들을 향해 행군하였다.

 

이윽고 동호들이 보이는 걸미산까지 다다르자 멀리 몽고 진영에는 대낮같이 밝은 화톳불 아래 질탕 먹고 마시고 놀던 몽고 장수 이하 졸개들이 무장을 허트린채 여기저기 머리를 쳐박고 잠들어 있으며 순찰을 도는 기마군들마저 몇군데 모여 앉아 술타령이 한창이었다. 별로 저항을 받지 않고 승승장구 연전연승한 승자의 태만함을 엿본 임장군은 제 1군에게 엄명을 내린다. "제 1군을 듣거라! 너희들은 각기 놈들의 진영을 맡아 잠입하여 일시에 진영을 불 지르라. 너희들의 성공 여하여 따라 오늘의 전투는 판가름이 날 것이다." 나직하지만 결의와 위엄에 찬 장군의 명이 떨어지자 마른 섶을 짋어진 1군의 의병들이 발 소리를 죽여 가며 몽고 진영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뒤이어 장군은 제 2군에게 엄명을 내린다. "제 2군은 몽고 진영에 불이 붙거던 사방에 흩어져서 힘껏 징과 꽹과리를 울려라." 제 2군 의병들도 소리없이 몽고 진영을 향해 잠입해 들어간다. 병사들이 숨을 죽이고 몽고 진영을 바라보고 있을 때, 장수가 잠들어 있는 가운데의 본영 에 불길이 오르는 것을 기다리기나한 듯 15개의 진영 근처에 일제히 불길이 솟아 올랐다. "불이야!........." "이놈들아! 뭣들 하느냐! 어서 불을 꺼라!" 미쳐 군장고 하지 못한채 장수이하 졸개들이 갈팡질팡 뛰는 꼴을 볼 수 있었다. 뒤이어 어 둠을 깨고 징과 꽹과리 소리가 깊은 밤 하늘의 적막을 깨고 요란하게 울린다. "딩 ― 딩 ― 딩 ―" "깨갱 깨갱 깽 깽 깽" 술에 취하고 잠에 취했다. 몽고병들이 번쩍 정신이 들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법석이는 동 안 3군의 의병들이 마초를 쌓아놓은 곡간과, 군량미 곡간에 일제히 불화살을 쏘아 거기에도 화염이 충전한다.

 

임 장군은 파수병의 말을 배앗아 타고 장검을 높이 들고 호랑이를 제압하듯 우렁찬 소리로 "적장은 어디 있느냐? 상산 임 연이 여기 있다. 어서 나와 내 칼을 받아라!" 하며 싸우기를 청했다.

 

적장은, 장군의 뜻하지 않은 호통에 정신이 반쯤 나가 말을 거꾸로 타고 도망하다가 3군의 불화살에 등판을 맞고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장군을 잃은 몽고병들은 더욱 아수라장이 되어 불길을 피해 달아났으나 이를 대비해 매복한 의병들에게 거의 전멸을 당하고 말았다.

 

임 장군은 이 싸움에서 많은 병장기와 군마를 얻고 군량미까지 얻어 개선하여 돌아온 뒤어도 전투 준비는 게을리 하지않았으므로 그 후 진천 지방은 몽고병들의 병화를 면할 수 있었다.

 

한편 강화도에 피난하고 있던 조정에서는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매우 기뻐하며 대정이란 직을 주어 임장군을 기용하였고, 당시 최고의 권신인 최 항의 별장으로 있던 김 준이 임 장군을 을 불러, 부자의 의를 맺고 랑장으로 삼았다.

 

김 준의 세력이 점차 커지자 임 장군의 벼슬도 상장군까지 오르게 되었는데 당시 최 항의 정권을 이어 받은 최 의가 집권하였으나 병약하고 재물을 몹시 탐하므로 인심을 잃었다. 임 장군은 김 준을 도와 최 의를 제거하고 국정의 모든 권한을 고종에게 돌렸다. 이로 인해 장군은 위사 공신의 칭호를 받았고 진천 지방은 공신의 출생지인 까닭에 창의현으로 개칭되었으며 현령을 두는 현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한편 몽고에서는 개경의 주둔을 배가하며 고려의 항복을 요구했는데 28년이나 전화에 시달린 고려는 그 힘이 다해 왕이하 모든 신하가 항복의 뜻을 보였다.

 

권신 김 준이 죽은 뒤 실권을 잡고 있던 임 장군은 "항복이란 당치도 않은 소리요, 설사 우리의 힘이 다했다고는 하나 마지막 임 연이 있는한 항복이란 말을 꺼내는 자가 있으면 그놈 마저 이 칼에 죽을 것이오." 하고 반대를 했기 때문에 감히 항복의 뜻을 보이지 못했다.

 

장군은 고려 무인의 전통적 자주성을 이어받아 항전하기를 거듭 다짐하며 야별초룰 각 지방에 파견하여 몽고에 계속 항전키 위한 군비 증강에 박차를 가했고 김 방경을 적진에 보내어 화친을 교섭했다.

 

그러나, 원종11년 몽고에 들어 간 원종이 몽고에 완전 항복하고

 

1. 고려의 세자는 몽고의 공주와 혼인할 것

2. 강화도에서 즉시 개경에 환도할 것

3. 모든 권신을 제거할 것 등을 약속하고 돌아오자 임 장군은 의분을 참지 못해 울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임 장군이 죽자 그의 아들 유무가 교정별감이 되어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항몽 전투를 서둘렀으나 이미 기울어진 대세는 돌이킬 수 없었다.

 

3.최유경

 

최 유경은 전주 최씨이며 자는 경지요, 호는 죽정이며, 시호는 평도공이다.

 

고려 말엽에 공주 목사로 있을 때 옥천 보은 등지에 왜구 천여명이 들어온 것을 격파하여 큰 공을 세웠다. 태조 5년 8월에는 도성을 쌓고 사대문을 건축할 때 총책임자인 성문제조가 되었다.

 

정종 2년 1400년 1월에 중추원사로 흥국사에 나가 7일 도장을 베풀었는데 대성황을 이루었다.

 

동년 12월에는 판한성부사로 태상왕의 환갑잔치에 나갔다. 태종 원년 1401년 9월에 10월 상달 축하사로 명경에 다녀 왔다.

 

태종 때에 청백리로 기록되었다. 태종 6년에 참찬의 정부사의 벼슬에 올랐다. 이 해에 벼슬 길을 물러나 초평면으로 와서 호를 죽정 이라 하고, 한가롭게 세월을 보내다가 태종 13년 1413년에 세상을 마치었다.

 

공은 벼슬길에 있을 때부터 효행이 지극하였으며 부친상을 당하였을 때 산소 옆에 여막을 짓고 여묘를 살았다.

 

공의 여섯째 아들 최 사흥은 충남 대흥현 갑무를 지냈다. 효성이 지극하여 벼슬길을 버리고 집으로 와서 부모 봉양으로 세월을 보냈다. 지극한 효성으로 나라에서 정려의 표장을 받았다. 효자 정문은 문백면 구곡리 외구마을에 부자분의 정문을 건립하였으며 후손은 이 마을에 오랫동안 거주하고 있다.

 

4.김덕숭

 

공의 호는 모암으로 1373년에 이월면 사곡리 사지마을에서 탄생하였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할 때에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글이 나오면 몇 번이든지 되풀이하여 읽었으며, 특히 효경을 좋아하였다.

 

1401년에 목천 현감으로 있을 때 군민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기 모두 편안하게 지냈다. 1404년에 부모 봉양을 하기 위하여 벼슬을 그만 두고 집으로 와서 있었다. 1403년에 사헌부 집의의 벼슬을 하였으며 1419년에 온양 군수 1426년에 한산군수로 나갔다. 1427년에 공의 나이가 55세였고, 아버지는 78세, 어머니는 77세였다. 벼슬길에 있었기에 부모 봉양을 하기 위하여 벼슬을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꿩고기, 어머니는 물고기를 좋아하셨기에 날마다 산에 가서 사냥을 하고 냇가에 나가서 고기잡이로 재미를 삼았다.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려는 마음에서이다. 언제나 부모 생일이 되면 이웃에 있는 노인을 청하고 친척이 모인 자리에서 장수하기를 빌면서 술잔을 올리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부러워 하였다. 근동네 사는 사람들 중에서 학문을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모두들 공의 덕을 본받아서 이름 높은 학자도 있었고, 한문의 깊은 뜻을 깨우친 사람도 90여명이나 되었다 한다.

 

1421년에 공의 나이 59세였다. 어머니가 병으로 누워 있을 때 물고기 생각이 난다고 했다. 때는 엄동설한 추운 때였다. 여계소로 나가서 보니 얼음이 얼어서 도저히 물고기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얼음 위에 굻어 앉아서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렸다. 무릎이 있는 곳부터 얼음이 녹기 시작하더니 조그마한 굴이 생겼다. 즉시 도끼로 쳐서 굴을 크게 만들었다. 다시 기도를 올렸다. 얼마 뒤에 갑자기 잉어 두 마리가 튀어 나왔다. 매우 기뻐하면서 잉어를 들고 집에 와서 어머니께 끓여 드리었다. 또한 어느날 한 약구에 가서 약을 지으려 하니 약재료 3가지가 없다는 것이다. 시골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구해야 하는가 하고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서울에서 약장수가 이에 감동하여 달려 왔다. 그는 한약방에 가지고 가서 약을 지은 뒤에 다려 드리어 어머니 병을 치료해 드렸다.

 

1434년 갑인 12월에 어머니가 작고하셨다. 정성껏 장례를 마친 뒤에 여막을 짓고 여묘를 살았다. 산소는 집에서 1km 정도 떨어져 아침 저녁으로 산소에 나가서 슬프게 곡을 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슬프게 하였다. 여묘를 사는 동안에도 아침 저녁으로 집에 와서 아버지께 문안을 드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른 일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걸어 다니기가 어려울 터이니 말을 타고 다니라고 권하였지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걸어서 다니었다. 참으로 놀라운 정성이었다. 여묘를 살던 첫날밤에 범 두 마리가 와서 여막의 좌우에 앉아 지켜 주었는데, 낮에는 다른 곳으로 가고, 밤에는 와서 여막의 근방을 두루 살피었다. 3년상이 끝난 뒤에 가 버렸다고 한다. 동물까지도 공의 효성에 감동한 것이다.

 

1436년 병진에 3년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부터 아버지 옆을 조금도 떠나지 아니하고 봉양에 정성을 다 하였다. 1437년에 장모 정씨를 모시고 왔는데 친어머니를 봉양한듯 하였다. 군내 유림들이 모두 감탄하였으며 칭송이 자자하였다. 세종 26년 1444년 72세때에 아버지는 95세였다. 세종임금께서 초정으로 오시게 되었다. 거기서 공의 효행이 지극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술20병, 말린 청어 50드름, 말린 돼지고기, 말린 노루고기 4마리, 말린 꿩고기30마리를 부모 봉양에 쓰라고 내리었다. 또 감사에게 명령하여 쌀 20가마를 보내라고 하였다. 하사품을 받은 공은 아버지를 모시고 행재소로 갔다. 그 곳에서 임금을 뵈었는데 부자분이 모두 머리가 백발이기에 누가 아버지인지 아들인지 분별할구가 없어서 임금이 직접 물으시었다. 공은 즉시 이 어른이 아버지라고 아뢰자 모두들 놀래었다. 그 때 임금은 즉시 옷 한 벌씩을 하사하였다.

 

같은 해 7월에 아버지가 별세하였다. 어머니 산소에 합장한 뒤에 여막을 짓고 여묘를 살았다. 잘 때에 요 이불을 덮지 아니하고, 밥을 금하고 죽만 들으며 초석 위에서 거처를 하기에 몸은 파리하고 곡을 할 때에 흘린 눈물은 하얀 수염에 묻어서 마르지 않았다. 이웃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초석위에서 자고 죽만 먹는 것은 장정도 어려운 일인데 70세가 넘어 몸이 쇠하였으니 자손에게 시키도록 하여달라고 하였지마는 듣지 않았다. 공은 그 말을 듣고 울면서 말하기를 아버지를 땅에 모시고 자식된 도리에 어떻게 집에 가서 편안하게 지낼 수가 있겠는가 이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으며, 나이도 70세가 넘었으니 산소 옆에서 살다가 죽어도 한이 없다고 하였다. 새벽이 되면 일찍 일어나서 상옷을 입고 산소에 나가서 곡을 하였으며 해가 넘어가면 등불을 켜놓은 뒤에 밤이 새도록 끄지 않았다. 1446년 74세에 3년간 여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신주를 모신 뒤에 아침 저녁으로 문안들 드렸고 초하루, 보름 날을 제사를 지내고 한식이나 칠석과 같은 명절에는 반드시 시식을 올렸다.

 

1448년 무진76새 4월에 감환으로 정침에서 고종하였다. 겨울에 진천 판사 송 기등 95인이 연명하여 현에 글을 내고 감사에게 보고하고 다시 조정에 글을 올리어 정려표묘의 은전을 입었다 자상한 이야기는 삼강행실도에 기록되어 있다. 또 임금이 직접 시를 지어서 내리었으니 "부모 봉야에 마음을 두었기에 벼슬을 사직하고, 집에 돌아와서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에 평생을 바치었도다. 어머니 산소 옆에서 여묘를 살면서 아침 저녁으로 전을 드리고 나면 아버지께 와서 문안을 드리었도다. 참으로 훌륭한 일이로다." 하였다. 또 한 수의 글뜻은 "아버지를 땅속에 장사 지냈으미 어떻게 집에 와서 있을 수가 있으리오. 70세가 넘어서 아버지 상을 당하였지마는 3년간 여묘를 살았도다. 평생을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 간절하였으니 묘소앞에 세운 비 정려문은 빛나기도 하여라." 라고 하였다. 대왕까지도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여 마지 않는 글이다. 이렇게 시를 지어서 지극한 효성을 칭송하였고, 특히 증직으로 이조참의를 내리었다. 이 사실을 중국 천자에게 글을 내었더니 천하대효라고 하여 유서를 내리었다.

 

1568년 무진에 평천부원군 신 잡과 회헌 이 정영이 임금에게 상소하여 이월면 보현산에 서원을 건립하였다. 다시 상소를 하여 윤혀를 받은 후에 백원서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5.신팔균

 

이국 땅 만주에서 일생을 조국 광복을 위하여 교포들에게 민족 정신을 고취하고 독립군을 양성한 공로로 1963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된 분이 있으니 모든 군민의 그의 거룩한 뜻을 추앙하며 조국 통일을 위해 헌신하려는 의지의 등불이 되는 분 이 분이 바로 신 팔균 독립 투사이다.

 

선생은 한말에 이월면 노원리 논실 마을에서 신 석희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 후 한성부 판윤을 지낸 신 정희씨에게 양자로 갔는데 자는 윤수, 호는 동천, 본관은 평산이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의협심이 강하였으니 남을 위해 봉사할 줄 아는 귀염둥이로 자라났다.

 

항일 투쟁에 몸 바쳐 오신 아버지 신 정희씨의 영향을 받아 조국을 되찾기 위해서는 학문에 정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군인이 되어 직접 일제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더 적극적인 방법이라 생각하고 대한민국 군관 학교 제 1 기생으로 군정위며 중대장으로 복무하다가 1907년 8월 군대가 해산 당하자 직접 지도하여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1909년 뜻한 바 있어 학교를 아우에게 인계하고 애국 청년으로 조직된 비밀 운동 단체인 대동 청년단에 가담하여 보다 적극적인 항일 운동에 전력 하였다.

 

한일 합방이 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조국 광복을 되찾자는 일념으로 만주로 망명하여 시베리아, 북경, 상해로 돌아다니면서 조국 독립을 위해 몸 바칠 동지들을 규합하여 1918년 봄 동만주 길림성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39인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을 선포하여 우리 민족은 자주 민족이며 일제의 침략의 부당성을 만천하에 공포하였다. (기미 삼일 운동의 독립 선언보다 먼저 하였음)

 

1919년 기미 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온 강토를 만세 소리로 진동시키고 애국 지사들의 붉은 피가 산하를 물들일 때(4월) 신 팔균은 서로군정서의 교관이 되어 청천 교관과 함께 군사 훈련을 지도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그 해 5월 적극적인 무력인 양성을 목적으로 발족된 남만주 유하현에 있는 신흥 무관 학교의 교관으로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우리는 비록 약소 민족이지만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발정해 온 문화 민족이다.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우리들 자신의 손에 달려있다. 힘을 기르자, 독립을 찾자, 그래서 온 국민을 일제의 사슬에서 구하자!

이것은 바로 우리의 책무이며 꼭 실현해야 할 과업이다."

무관학교 생도들을 앞에 놓고 독립 운동의 필요성과 당위성, 우리의 각오 등 젊은이들의 폐부를 찌르는 연설은 그들의 가슴 속 깊이 조국애를 심어 주었다.

 

신흥 무관 학교의 훈련 과정은 하사관 반은 3개월, 장교 반은 6개월, 특별 반은 1개월의 기간으로 정하고 매일 14시간의 훈련을 실시하며 학과 1할, 교련 2할, 민족 정신 5할, 건설 2할의 비율로 훈련을 배정하였다. 즉 군관 학교는 민족 정신이 투철한 애국 지사의 양성에 두고 있다는 것을 이 시간 배당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애국 청년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어

“신흥 군관 학교에 입학을 하자.”

“나라를 위해 내 할 일을 찾자.”

고 하며 군관 학교 운영을 위해 물심양면의 지원자가 말로 증가하여 운영의 어려움은 없었으며 1920년 8월까지 이곳을 졸업한 학생 수가 2천 여 명이 넘었다 한다.

 

신흥 무관 학교의 경영은 전 만주 교포들이 조금씩 모아온 성금, 농사 짓는 교포들이 알뜰히 모은 자금, 독지가들의 지원 등 만주 교포들의 총화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으며, 여기에 국내 우국 지사들의 도움으로 수많은 독립 운동 간부들을 배출하였으며, 이 학교가 우리의 독립 운동 사상에 끼친 공로는 막대한 것이었다.

 

또한 이들 졸업생은 후에 신흥 학우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위해 많은 공헌을 하였다. 1922년 신 팔균은 남 만주의 여러 독립 운동 단체가 통합하여 결성된 통의부의 군사 위원장겸 총 사령관으로 수십차 왜적과 교전하여 남 만주 전역과 국내에서 일제의 판공서와 일제의 앞잡이 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

 

1920년 일본군의 만주 교포 대학살 사건이 있은 후 만주의 각 독립 운동 단체는 많은 타격을 받고 통일된 단체 조직의 필요성을 느껴, 1922년에 환 인현, 하구에서 한족회, 독립단, 광한단, 한교 민단 청년단 연합회, 연통제 기관, 광복군 총영 등의 대표자들이 화합하여 논의한 끝에 지금까지 분산되었던 각 단체를 통합하여 민족 단일의 독립 운동 단체로 통의부를 결성한 것이다. 신 팔균은 통의부릐 군사 위원장겸 총사령관으로 군사 관계의 책임을 지고 활동하였는데, 이 당시 병력은 8개 중대와 2개 독립 소대였다.

 

1924년 홍경현 이도구에서 사관들을 야외 훈련시키던 중 왜적이 섞여 있는 마적떼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이 슬픈 소식을 전해 들은 미망인 임씨는 북경에서 태아와 함께 음독 자살하였고, 장남 현충은 낙양 군사 학교를 졸업한 후 독립 운동에 활약하던 중 부친의 슬픈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투신 자결하였다. 신 팔균은 짧은 일생을 오직 조국의 광복을 위해 자신과 가족을 돌보지 않고 헌신하였으며, 만주의 교포들에게 민족혼을 불어넣어 준 애국 지사이다.

 

6.이상설

 

고종 7년 서기 1870년에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 산직말에서 학자 이 행우공과 모친 벽진 이씨의 맏아들로 출생하였다. 자는 순오요 호는 보재니 본은 경주다.

 

1876년에 이 용우공이 아들이 없어서 아들을 정하려고 일갓집이 모여서 사는 초평으로 내려 왔다. 여러 아이들이 모여서 놀이를 하고 있었다. 공은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눈여겨 살펴 보았다. 그 중에서 제일 영특하고 재주가 있어 보이는 아이가 있었다. 연탐하여 보니 행우공의 아들이었다. 그 집에 가서 상의하여 양자를 하게 되었으니 보재는 그 때 나이가 7세였다. 즉시 용우공은 서울로 데리고 가서 공부를 시키게 되었다.

 

13세와 14세 사이에 생양가의 부친상 생가의 모친상을 당하여 애통하는 모습은 조상하러온 손님들의 마음을 슬프게 하였다.

 

공은 1894년 25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한 뒤에 벼슬길에 올랐다. 성균관교수 성균관장 한성 사범학교 교관등을 역임하였다.

 

이 때에 헐버드박사와 친교를 맺은 뒤에 영어, 프랑스어 등 외국어와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보재의 천재적인 재주와 명민한 머리로서 모든 학문을 쉽게 깨우칠 수가 있었다.

 

1904년에 일본이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함에 보재는 즉시

"일본이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는 침략상과 부당성을 들어서 일본인의 요구를 배척해야 한다."

는 상소문을 올렸다. 고종 임금은 상소문이 정당하다고 받아 들이어 일본인이 요구하는 것을 배척하였다.

 

그 후에 만민 공동회를 방불케 하는 보안회를 조직한 뒤에 날마다 종로나 서울거리를 연일 돌아다니면서 규탄대회를 열었다. 일본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하여 여러모로 계획하고 있는 모든 기도는 좌절되었다.

 

같은 해 8월에 보안회의 후신으로 대한 협동회를 조직하였다. 회장에 보재가 선임되고 부회장에 이 준, 총무에 정 운복, 평의장에 이 상재, 서무부장에 이 동휘, 편집부장에 이 승만, 지방부장에 양 기탁, 재무부장에 허 위등이 선임되었다. 이 회는 뒷날에 민족 운동을 전개할 때에 인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것만으로 볼 때에도 우리의 국민은 조국을 지켜야 한다. 다른 나라에 침략을 당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굳은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공은 1905년에 학부협판 법무협판을 거쳐서 의정부 참찬에 발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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