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2반

푸르른 하늘 위

맑은 햇살 아래~

우리들 함께 가요

서로 손 잡고~

내가 먼저 배려하는, 예절바른 어린이!
  • 선생님 : 최정빈
  • 학생수 : 남 12명 / 여 13명

최준호 유관순

이름 최정빈 등록일 18.04.26 조회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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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은 충청 남도의 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선교사의 소개로 이화 학당에 입학했다.

그런데 유관순이 학교에 입학한 다음 해에 고종이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일제가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자 백성들은 분노로 치를 떨었다. 참다 못한 일본 유학생들이 2월 8일에 독립 선언을 했고, 3월 1일에는 서울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만세 운동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총독부는 모든 학교에 강제로 휴교령을 내렸다. 유관순은 고향으로 내려와 서울에서 있었던 만세 운동을 전했다.

“나라님이 왜놈들 손에 죽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우리도 뭔가를 보여 줘야 한다고요. 우리 나라를 되찾아야 해요!”

유관순은 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밤새 태극기를 만들고 만반의 준비를 한 뒤, 날이 밝자 동지들과 함께 장터에 모인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여러분! 반만 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나라를 저 잔인한 일본이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그 동안 우리 민족은 나라 없는 서러움과 일제의 압박에 시달려 왔습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 일어날 때입니다. 나라를 되찾읍시다. 대한 독립 만세!”

아우내 장터에 모인 3,000여 명의 사람들이 유관순을 따라 다 같이 만세를 불렀다.

“대한 독립 만세, 만세!”

그러자 일본 헌병들이 사람들을 향해 마구 총을 쏘았다.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유관순은 주동자로 몰려 체포된 뒤 고문을 당했다.

“내 나라에 쳐들어온 너희에게 나는 재판을 받을 필요가 없다. 나는 내 나라에서 당당한 일을 했을 뿐이다!”

유관순은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일본 경찰에 대항했다. 유관순은 3년형을 선고받고 서울 서대문 형무소로 옮겨졌다.

유관순은 그 어떤 고문도 꿋꿋이 참아 냈지만, 결국 19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차디찬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어린 나이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유관순의 애국심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다. 그 뒤 1962년에 유관순에게 건국 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네이버 ì§?식백과] 유관순 (한 권으로 끝내는 교과서 위인, 2005. 12. 30., 지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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