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2반

푸르른 하늘 위

맑은 햇살 아래~

우리들 함께 가요

서로 손 잡고~

내가 먼저 배려하는, 예절바른 어린이!
  • 선생님 : 최정빈
  • 학생수 : 남 12명 / 여 13명

이영찬 이순신 장군님

이름 최정빈 등록일 18.04.26 조회수 12

출생

본관은 덕수()이고,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이다. 1545년(인종 1) 4월 28일(음력 3월 8일) 한성부() 건천동(, 현재 인현동)에서 이정()과 초계 변씨()와의 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보성군수 등을 지낸 방진()의 딸인 상주 방씨()와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으며, 이 밖에 해주 오씨( )와의 사이에 2남 2녀가 있었다.


이순신

이순신


무과급제와 함경도 근무

1572년(선조 5) 훈련원() 별과()에 응시했으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탈락하였다. 그래서 30세가 넘은 1576년(선조 9)에야 식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해 관직에 나섰다. 권지훈련원봉사()와 함경도의 동구비보() 권관(), 발포수군() 만호() 등을 거쳐 건원보() 권관, 훈련원() 참군()을 지냈다. 하지만 1583년(선조 16)에 부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부친상을 마치고 1586년(선조 19) 사복시() 주부(簿)로 다시 관직에 나서, 곧바로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듬해 녹둔도(鹿)의 둔전()을 관리하다가 여진족의 습격을 당해 피해를 입으면서 경흥부사(使) 이경록(祿)과 함께 감옥에 갇혔다. 당시 이순신의 병력 증원 요청을 병사 이일()이 무시해서 벌어진 일이었으나, 이순신은 패전의 책임으로 장형()을 당한 뒤에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전라도 수군절도사

1589년(선조 22) 이산해()의 추천으로 다시 관직에 나서게 된 이순신은 감사 이광()의 군관으로 전라도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 조방장()과 선전관() 등을 거쳐 정읍현감이 되었으며, 1591년(선조 24)에는 진도군수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使)로 임명되었다.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한 이순신은 전함을 건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며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임진왜란과 해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수사 원균()의 요청을 받아 경상도 해역으로 출정해 왜군과의 해전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두었다. 6월 16일(음력 5월 7일) 옥포()와 합포()에서 왜선 30여척을 격파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고(옥포해전), 다음날에도 적진포()에서 10여척의 왜선을 격파하였다(적진포해전). 이 전투들에서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왜군과의 해전에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공으로 이순신은 종2품 가선대부()로 승진했다. 7월 8일(음력 5월 29일)에는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해 사천()에서 서해로 북상하려던 왜선 13척을 모두 격침시켰다(사천해전). 이 전투에서는 거북선이 처음으로 실전에 배치되었다. 7월 10일(음력 6월 2일)에는 당포()에서 왜선 21척을 불태웠으며(당포해전), 7월 13일(음력 6월 5일)에는 왜군이 도주해 진을 치고 있는 당항포()를 공격해서 왜선 26척을 격침시켰다(제1차 당항포해전). 이러한 잇따른 승리로 이순신은 정2품 자헌대부()가 되었다.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막다

이순신에게 잇따라 패배한 왜군은 수군의 모든 역량을 전라도로 집결해 맞서려했다.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8월 14일(음력 7월 8일) 견내량()에 집결해 있는 왜군을 한산도()로 유인해 50여척의 왜선을 격파ㆍ나포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한산도대첩). 그리고 안골포()에서 지원하러온 왜군을 다시 물리쳤으며(안골포해전), 10월 5일(음력 9월 1일)에는 왜군의 근거지인 부산포()에서 왜군의 병선 100여척을 파괴했다. 이러한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장악했고, 북상하던 왜군은 병력 보충과 군수품 보급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공으로 이순신은 정2품 정헌대부()가 되었다.


[거북]

거북선

거북선은 왜구의 격퇴를 위하여 돌격선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장갑선의 일종인데 이미 고려말 또는 조선초부터 제조, 사용되었으나, 1592년(선조 25)에 발발한 임진왜란 때 이순신에 의하여 철갑선으로서의 거북선이 창제, 실용화되었다. 복원된 거북선

[네이버 ì§?식백과] 거북선 [거북船]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삼도수군통제사 임명

이순신은 1593년 8월 한산도로 본영을 옮겼으며, 9월에는 삼도수군통제사(使)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23일(음력 3월 4일) 당항포에서 왜선 30여척을 격침시켰고(제2차 당항포해전), 11월 11일(음력 9월 29일)에는 곽재우(), 김덕령() 등의 의병과 합세해 거제도 장문포()에 주둔하던 왜군을 공격했다(장문포해전). 그리고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호남지역으로 들어오는 피난민들을 돌보고, 전쟁의 장기화할 것에 대비해 둔전()을 일구고 병사들을 조련하였다.

원균과 갈등 그리고 파직되어 백의종군

하지만 당시 붕당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던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과를 놓고서도 논의가 분분했다. 특히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이 문제가 되었는데, 조정은 원균을 충청 절도사(使)로 옮겼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대체로 원균의 편에 서서 여러 차례 이순신을 탄핵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와 강화교섭을 하던 고니시 유키나가[西] 휘하의 요시라()라는 인물이 가토 기요마사[]가 다시 조선을 침략하러 바다를 건너오니 수군을 보내 이것을 막으라는 계책을 조정에 전달했고, 이를 믿은 조정은 도원수 권율을 통해 이순신에게 수군을 이끌고 출정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왜군의 계략에 빠져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한 이순신은 출정하지 않았고, 결국 그 책임으로 파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1597년 4월 이순신은 한 달 가까이 투옥된 상태에서 혹독한 문초를 받았고, 5월 16일(음력 4월 1일)에야 풀려나 권율의 진영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명량해전에서 대승

그러나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8월에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에 대패하여 전라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과 함께 전사하면서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이순신은 남아 있는 전선을 수습하여 붕괴된 조선 수군을 재건했으며, 10월 25일(음력 9월 16일) 진도 울돌목에서 13척의 배로 130여척의 왜군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명량해전).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다시 장악했으며, 왜군의 수륙병진작전()을 무산시켜 정유재란의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한양으로 진공하던 왜군은 보급로가 끊길 것을 우려해 충청도 직산()에서 진격을 멈추었으며, 그 뒤 전쟁은 남해안 일대의 왜성()에서 농성하는 왜군을 조명연합군()이 공격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충무공 이순신 표준 영정

장우성, 〈충무공 이순신〉, 비단에 채색, 193×113㎝, 아산 현충사. 장우성이 그린 이순신 초상이다.


노량해전에서 전사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1598년(선조 31)에도 절이도()와 고금도()에서 왜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왜군은 그해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철수를 준비했는데, 이순신은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해 노량()에서 500여척의 왜군과 싸워 200여척의 적선을 불태우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노량해전).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도주하던 적선을 추격하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이순신이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숨이 끊어졌으며, 조카인 이완()이 그의 죽음을 숨긴 채 전투를 독려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죽음 소식을 들은 조정은 이순신에게 우의정()을 추증했다. 이순신은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으로 녹훈되었으며, 좌의정이 증직되었고 덕풍부원군()으로 봉해졌다.

충무라는 시호를 받고 영의정에 추증됨

1643년(인조 21)에는 ‘충무()’의 시호를 받았고, 1659년(효종 10)에는 남해의 전적지에 그의 비석이 세워졌다. 1707년(숙종 33)에는 충청도 아산()에 세워진 그의 사당에 ‘현충()’이란 호가 내려졌으며, 1793년(정조 17)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유품과 기록물

이순신은 시문()에도 능하여 시조 및 한시와 《난중일기()》 등을 남겼다. 그의 유품 가운데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는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고,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는 유물들은 보물 제32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명나라 신종이 그에게 준 8종 15개의 유물들인 통영의 ‘충렬사팔사품()’은 보물 제440호로 지정되어 있다.

아산 현충사 배향

그는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숭배되어 통영 충렬사(, 1614년 건립, 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 1601년 건립, 사적 제381호), 아산 현충사(, 1706년 건립, 사적 제155호) 등에 배향되었다. 그의 묘는 충청남도 아산에 있다

이전글 최준호 유관순
다음글 (자기 이름)위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