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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손 잡고~
박상훈-태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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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최정빈 | 등록일 | 18.04.19 | 조회수 | 2 |
첨부파일 | |||||
음성 태교사충북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 문화재자료 제7호. 조선시대. 조선 철종 7년 주응동이 문익공이 김여지가 명나라에서 가지고 온 것을 안성에 사는 김용으로부터 주자의 영정을 기증받아 주씨문중에서 문곡영당이라고 칭하고 사당을 창건하였다. 사원을 개원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원되었다가 1893년 다시 건립되어 사당의 명칭도 태교사(泰喬詞)라 하였다.
지정종목
문화재자료
지정번호
충북문화재자료 제7호
지정일
1987년 03월 31일
소재지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원중로399번길 316(조촌리 1284-1)
시대
조선
종류/분류
사당
크기
건평 33㎡
1987년 3월 31일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1744년(영조 20) 주응동(朱應東)이 조선 초기의 문신 김여지(金汝知:1370~1425)가 명에서 가져온 주자(朱子:1130~1200)의 영정을 경기도 안성에 사는 김용으로부터 기증받아 봉안하기 위해 세운 사당인 문곡영당(文谷影堂)이 그 시초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형으로 철폐되었으나 1893년(고종 30)에 재건하여 이름도 태교사라 개칭하였으며, 1905년과 1940년에 중수하고, 1963년 계단을 신설하고, 정문을 중수하였다. 사당, 강당 겸 재실, 삼문으로 구성되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고, 건평은 33㎡이다. 정면 3칸 기둥 사이의 간격은 2.14m로 등분하였으며, 측면의 툇간 1칸은 1.2m로 좁게 하였으며, 나머지 1칸은 2.46m로 분할하였다. 높이 70㎝의 자연석 기단 위에 8각형의 주춧돌이 놓였으며, 그 위에 둥근기둥과 사각기둥을 혼용하여 세웠다.
기둥 위의 공포는 무출목 1익공 형식이며, 외부로 돌출된 부재는 쇠서가 퇴량 끝부분에서 직각으로 꺾였다. 창방(昌枋)으로 결구된 기둥 사이에는 소로가 4구씩 배치되어 주심도리와 장혀를 받쳤다.
가구(架構)는 퇴주와 평주 사이에 내고주(內高柱)를 세워 툇보와 대들보를 결구하는 형식으로, 대들보 윗부분에 동자기둥을 세워 보를 받쳤다. 보의 윗부분에 높이 57㎝의 사다리꼴 모양의 대공(臺工)을 놓아 종도리와 옥개의 무게를 지지하도록 하였다. 사당의 양쪽에는 은행나무가 있으며, 안에 주자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해마다 주자의 생일인 음력 9월 15일에 향사한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정면 양쪽 2칸은 온돌방을, 중앙 2칸은 대청을 두었다. 창호는 정면의 중앙 2칸에 4분합 띠살문을, 양쪽 칸의 윗부분에 쌍여닫이 띠살창을 달았다. 정면 4칸 기둥 사이의 간격은 2.43m로 등분하였고, 측면은 불규칙하게 나누었다.
높이 1.36m의 기단 위에 덤벙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가로 21㎝, 세로 21㎝의 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의 공포는 창방과 기둥머리가 없는 간단한 부재를 안팎으로 나오게 하여 대들보의 무게를 받쳤다. 가구는 평주 위에 대들보를 결구하는 형식으로, 대들보 윗부분에 높이 24㎝의 동자기둥을 세워 보를 받쳤고, 그 위에 높이 54㎝의 사다리꼴 모양의 대공을 세워 종도리와 옥개의 무게를 받쳤다.
홍살문을 지나면 전면에 재실이 있으며, 그 뒤에 담장을 두고 솟을삼문 형태의 삼문이 있고, 삼문을 지나면 사당이 있다. 전체적으로 강당이 앞에, 사당이 뒤에 있는 전당후묘 형식의 건물 배치이다.
[ë¤ì´ë² ì§?ì백과] 태교사 [泰喬祠]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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