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러분!
배려와 존중이 있는 4학년 6반 같이 만들어가요
청주의 위인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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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임재정 | 등록일 | 18.05.08 | 조회수 | 315 |
1.손병희(1861년 4월 8일 ~ 1922년 5월 19일) 6번이 없어요. ㅠㅠ
호 의암. 초명 응구. 후명 규동. 충북 청주 출생. 1882년(고종 19) 22세 때 동학에 입교, 2년 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수제자로서 연성수도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통령으로서 북접의 농민군을 이끌고 남접의 전봉준과 논산에서 합세, 호남 ·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원산 ·강계 등지로 피신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뒤를 이어 3년 동안 지하에서 교세 확장에 힘쓰다가 1901년 일본을 경유, 상하이로 망명하여 이상헌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 ·박영효 등을 만나 국내사정을 듣고 1903년에 귀국, 두 차례에 걸쳐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으로 데리고 건너가 유학시켰다.
1904년 권동진 ·오세창 등과 개혁운동을 목표로 진보회를 조직한 후 이용구를 파견하여 국내 조직에 착수, 경향 각지에 회원 16만 명을 확보하고 전회원에게 단발령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이용구가 배신하여 친일단체인 유신회와 합하여 일진회를 만들고 을사조약에 찬동하는 성명을 내자, 즉시 귀국하여 일진회와는 관계가 없음을 밝히고 이용구 등 친일분자 26명을 출교시켰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제3세 교주에 취임, 교세 확장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를 창립하고 보성·동덕 등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 ·문화사업에 힘썼다. 1908년 교주 자리를 박인호에게 인계하고 우이동에 은거, 수도에 힘쓰다가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치료중 별장 상춘원에서 사망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도종환 (1954. 9. 27 ~ )
시인·작가로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다.
도종환은 청주 중앙초등학교를 거쳐 청주중학교를 졸업했다.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3년 동안 원주고등학교에서 유학한 뒤 바로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진학했다. 1985년 충청북도 청원군 부강중학교에 근무하던 시절에 발간한 그의 첫 시집 〈고두미 마을에서〉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는 이미 이때부터 깊숙한 자기 울림의 세계를 그려낸 훌륭한 시인으로 인정받기에 충분했다. 또한 어린 두 아이를 두고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의 아내에게 바친 시집 〈접시꽃 당신〉과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1988)이라는 2권의 시집은 그가 얼마나 깊은 사랑을 지니고 있는지 보여주었다.
도종환은 교사가 된 후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약칭 전교조) 결성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었고, 수인의 몸으로 교육 시집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1989)을 발간했다. 그후 도종환은 전교조 충북지부장으로서, 또한 충북문화운동연합의장으로서 활동했다. 그는 청주와 대구를 넘나들며 '분단시대'라는 동인 모임을 결성, 군부독재의 탄압에 맞서 동인지 간행을 주도했고(1984년 1집을 발간한 이후 5집까지 발간함) 그 문학적 열정과 업적을 인정받아 1990년 '신동엽 창작 기금'에 이어 제7회 민족예술상을 수상했다.
그는 1990년 산문집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과 〈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 배〉, 그리고 1998년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를 발간했다. 또한 1993년 시집 〈당신은 누구십니까〉와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1994), 그리고 〈부드러운 직선〉(1998) 등을 연달아 발표했다.
도종환은 1998년 9월 충청북도의 작은 시골 학교인 진천 덕산중학교로 복직되었다. 그는 2004년 건강 문제로 교직을 떠났다. 그밖의 저서로는 시집 〈슬픔의 뿌리〉(2002)·〈해인으로 가는 길〉(2006), 산문집 〈모과〉(2000)·〈사람은 누구나 꽃이다〉(2004)·〈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2000), 동화 〈바다유리〉(2002)·〈나무야 안녕〉(2007) 등이 있다. 민족예술상(1997), 거창평화인권문학상(200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부문 예술상(2006) 등을 수상했다.
3.곽예 (1232~1286)
충렬왕이 즉위하자 판도정랑보문서대제 지제고로 임명되고, 이어서 국자사업 전법총랑위위 윤춘궁시강학사를 역임하였다. 1282년(충렬왕8)에는 우부승지로서 동지공거를 겸한 뒤 좌승지 국자감 대사성문한학사를 거쳐 1286년 지밀직사사 감찰대부로서 성절사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오던 도중 병들어 죽었다. 강직하고 소박한 성품이었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에 그의 묘소가 있다.
4.송상현 (1551~1592)
1584년 종계변무사의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뒤 호조·예조·공조의 정랑 등을 거쳐 동래부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동래성에 육박하자 항전했으나 함락되게 되자 조복을 갈아입고 단정히 앉은 채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충절에 탄복한 적장은 시를 지어 제사지내 주었다. 이조판서·찬성이 추증되고, 동래 안락서원에 제향되었다.
충북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산1-1번지에 그의 묘소가 있다.
5.강익중 (1960~)
6.김수현 (1943.1.27~)
충청북도 청주 출신으로 국내 방송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방송작가이다. MBC 개국 7주년 기념 라디오 드라마극본 현상공모에 《저 눈밭에 사슴이》가 당선되어 방송 작가의 활동을 시작했다. 언제나 드라마의 중심에는 가족이 등장하는 한국적인 정서를 중시한다. '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뛰어난 작가이다. 또한 인물의 성격을 그들이 사용하는 말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데 있어 효과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시체도 벌떡 일으켜 TV앞에 앉힌다"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일부에서는 '주인공들이 쉴새없이 내뱉는 따발총 대사', '독설, 숨쉴 새 없이 쏘아대는 말장난'이라며 부정적으로 여기기도 한다.
7.이운재 (1973.4.26~)
충청북도 청주 출신인 축구선수로서 포지션은 골키퍼이다. 청남초등학교, 대성중학교, 청주상업고등학교, 경희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웬만한 공은 그의 손에 걸린다고 하여 '거미손'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심장으로 '돌부처'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동적인 스타일의 김병지와는 달리 수비진 리딩을 중시하는 정적인 스타일이다.
특히 페널티킥 세이브에 일가견이 있어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스페인의 키커 호아킨 산체스의 슛을 막아내 한국의 4강진출에 공헌했으며, K리그에 승부차기제가 시행되던 시절에는 승부차기 방어율 1위였다. 2011년 수원삼성 블루윙즈에서 전남 드래곤즈로 이적이 되었다. 2011.05.29.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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