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의거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안중근은 침략의 주도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여러 차례 일본 총리를 지낼 정도로 일본 정계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본에서는 근대 일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정치인이지만, 우리나라에서 보면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에 통감부가 설치된 후에는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여 내정에 강하게 간섭하는 침략자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 10월 21일, 대동공보 이강 기자의 도움으로 안중근은 동지인 우덕순․조도선․유동하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하얼빈에 도착합니다. 이들은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하여 우덕순과 조도선은 차이쟈거우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거사하기로 합니다. 그러나 우덕순과 조도선은 경비병에게 발각당하여 이들은 거사 실행 전에 붙잡히고 거사의 성공은 안중근에게 달리게 되었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운명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였습니다. 여기서 기다리던 안중근에게는 경비병을 피하는 것도 문제지만 다른 난관도 있었는데, 바로 이토 히로부미의 정확한 얼굴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이 보편화된 지금으로선 검색 한 번만 하면 유명 정치인의 사진을 찾는 건 아주 손쉬운 일이지만, 당시는 사진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에 이미 서울에서 원태우 의사의 습격을 받은 적이 있었기에 암살 방지를 위하여 자신의 사진이 돌아다는 걸 철저히 막았습니다. 그래서 안중근은 대략적인 얼굴 묘사 정보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의거 당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데 사용한 권총> 그러다가 러시아 일반 관리들이 호위하고 흰 수염을 가진 노인이 이토 히로부미일 것으로 보고 총을 세발 쏘고, 다시 자신이 잘못 판단했을 걸 대비해 일본인 단체 가운데서 가장 의젓해 보이고 앞서가는 자에게 세 발을 쏩니다. 이 총격으로 이토 히보부미가 쓰러지고, 이토를 수행하던 비서관과 하얼빈 총영사, 만주철도 이사 등 일본인 관리들이 총탄을 맞아 중경상을 입습니다. 안중근은 곧 러시아 헌병이 와서 붙잡히니 큰 소리로‘ 대한만세’를 세 번 외치고 잡혀 갑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결국 절명하였습니다. 체포당한 안중근은 재판 과정에서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신분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다”고 하면서 국제법에 따른 대우를 요구하고 이토를 죽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1. 한국의 명성황후(明星皇后)를 죽인 죄 2. 고종황제(高宗皇帝)를 왕의 자리에서 내친 죄 3. 을사조약(5조약)과 한일신협약(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4. 독립을 요구하는 죄없는 한국인들을 마구 죽인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아 통감 정치체제로 바꾼 죄 6. 철도, 광산, 농림, 산지를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여 경제를 혼란에 빠뜨린 죄 8. 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죄 9. 민족교육을 방해한 죄10.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키고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죄11. 한국사를 없애고 교과서를 모두 빼앗아 불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13. 현재 한국과 일본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한국이 아무 탈없이 편안한 것처럼 위로 일본 천황을 속인 죄 14. 대륙(중국)을 침략하여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천황의 아버지를 죽인 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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