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천초 6학년!
1년간 즐겁고 신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사랑합니다^^
신미양요 조사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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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유정희 | 등록일 | 16.04.22 | 조회수 | 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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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란? 신미년에 일어난 조선 고종 8년(1871)에 미국 군함이 강화도 해협에 침입한 사건이며 대동강에서 불탄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문책과 함께 조선과의 통상 조약을 맺고자 하였으나 격퇴되었던 사건입니다. 미국은 1866년 8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두 차례 탐문항행을 실시하면서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응징과 조선과의 통상관계 수립을 목적으로 1871년 조선을 침략하였습니다. 아시아함대 사령관 J.로저스는 군함, 함재대포, 해군과 육전대원 총 1,230명을 이끌고 5월 16일 일본의 나가사키 항구를 출발하였습니다. 19일남향만에 도착한 미군은 뱃길을 탐사하면서 북상, 물치도를 자국 함대의 정박지로 정하였습니다. 미군은 조선에 탐측 승낙을 일방적으로 통고한 뒤 서울의 관문인 강화도 해협 수로의 측량과 정찰을 목적으로 두 척의 군함 을 파견하였습니다. 당시 밖으로 강력한 통상수교거부정책을 실시하던 흥선대원군은 미군의 불법 영해 침범을 경고하고 즉시 철수를 요구하였습니다. 미군이 경고에도 불구하고 광성진으로 접근해오자 조선군은 경고용 포격을 가하였고 이에 미군은 일단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미군은 조선군의 경고용 사격을 빌미로 삼아 오히려 조선정부에 사과와 손해보상을 요구하였습니다. 조선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미군은 6월 10일 군함 2척을 앞세우고 육상 전투대원 644명을 강화도의 초지진에 상륙시켜 무력으로 점령하고, 이어 덕진진 ·광성진을 차례로 점령하였습니다. 그러나 6월 11일의 광성진전투에서 미군 역시 피해가 많아 이튿날 물치도로 철수하였다. 미군은 이곳에서 조선정부를 상대로 위협적인 외교적 수단으로 조선을 개항 시키려 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강경한 통상수교거부정책과 조선 민중의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결과 결국 미국의 아시아함대는 조선에서 아무런 성과없이 일본으로 철수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서울의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조선이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운 프랑스와 미국의 두 차례에 걸친 무력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조선 민중의 반침략 의지 때문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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