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 5반

수줍은 많아보이지만, 내면이 강한 여학생13명과

은근 정많은 활발한 남학생 13명이 함께 배우는 6학년 5반 교실입니다.^^

함께여서 더 행복한 우리, 6학년 5반
  • 선생님 : 이민지
  • 학생수 : 남 13명 / 여 13명

윤봉길 조사함

이름 김태은 등록일 18.05.14 조회수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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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봉길 의사]
여기서 의사는 아픈사람을 치료하는
의사가 아니라 의로운 지사[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제 몸을 받쳐 일하려는 뜻을 가진 사람]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거점이 중국으로 옮겨지면서 항일운동이 중국, 만주에서 많이 진행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지원과 안내를 받아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윤봉길로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거사를 했다.

충청남도 예산에서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김원상(金元祥)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호는 매헌 10세 되던 해인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정신의 영향으로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하였다. 동생인 윤성의(와 함께 한학을 공부하였고, 1921년부터는 오치서숙에서 사서삼경 등 한문학을 계속하였다. 한문학 공부를 마치고, 1926년부터는 농민계몽·독서회운동 등 농촌사회운동을 펴나갔다.

 
농촌사회운동
농민계몽을 위해 《농민독본》이란 교재를 집필하여 야학회를 조직,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농촌의 불우한 청소년을 가르쳤다. 농촌의 발전을 위해 ‘부흥원'이란 단체를 설립하여(1929), 농촌 부흥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그해 2월 18일 부흥원 주관으로 학예회를 열고,
촌극인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였는데, 농촌에서 문화활동이 많지 않던 당시여서 관람객이 매우 많이 모여 성공리에 마쳤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농촌활동을 계속하였고, 월진회라는 농민단체를 만들어 회장에 추대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농촌자활운동을 펴나갔다. 또한 건강한 신체 위에서 농촌의 발전과 민족독립정신이 길러질 수 있다는 신념으로 ‘수암체육회'를 조직하여 농민들의 건강증진활동도 이끌어 나갔다.

 

만주 망명
그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무엇인가 큰 일을 해야겠다는 신념으로, ‘장부가 집을 나가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기고 만주로 떠났다(1930. 3. 6).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경찰이 미행을 하여, 평안도 선천에서 체포되어 45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하였고, 만주에서 같은 길을 걷는 김태식, 한일진 등을 만나 함께 독립운동을 결의하였다.

윤봉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야 성공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상하이를 향해 갔다. 그는 혼자 랴오둥 반도의 남단에 있는 다롄을 거쳐 산둥반도에 있는 칭다오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돈을 모으고 독립운동 할 곳을 물색하기도 하였다. 결국 1931년 8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그는 프랑스 조계 안에 있는 안공근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중국에서의 뜻있는 일을 위해 생활을 구상하였다. 우선 경제생활을 위해 한국인인 박진이 경영하는 공장에서 일하였다. 한편으로는 국제활동을 위해 상하이 영어학교에서 영어 공부도 병행하였다. 그리고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인 김구를 찾아가 그의 뜻을 말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다짐하였다.

 

훙커우공원의거
일본은 1932년 자작극인 일본 승려 살해사건을 이유로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다. 일본군은 시라카와 대장의 지휘하에 전쟁을 승리하였다. 일본군은 일본 국왕의 생일축일인 천장절과 전쟁 승리 두 가지를 축하하는 기념식을 갖기로 하였다. 윤봉길은 이 기회를 택하여 기념식장에서 거사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김구를 비롯한 이동녕, 이시영,조소앙 등 지도자들과 협의하여 거사를 구상하였다.

윤봉길은 야채상으로 가장하여 미리 기념식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기념식장에서 투척할 수류탄도 제조하였다. 폭탄 제조 전문가인 김홍일의 도움을 받았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은 폭탄(저격용 물통 모양의 폭탄 1개, 자결용 도시락 모양의 폭탄 1개)을 감추고 식장에 입장하였다. 그리고 식이 한참 진행중일 때 식장으로 다가가 수류탄을 던졌다. 이 폭발로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과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는 즉사하였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케미쓰 등이 중상을 입었다. 식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일본으로 옮겨져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되었다(1932. 11. 20). 그해 12월 19일 총살형을 받고 24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이 사건은 세계에 알려졌고,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는 “4억 중국인이 해내지 못하는 위대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고 격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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