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중학교 로고이미지

공지사항

RSS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카카오톡 공유하기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네이버밴드 공유하기 프린트하기
3.1절 계기 교육
작성자 정병숙 등록일 09.01.30 조회수 713
 

삼일절


1910년 일본 제국주의는 우리 주권을 빼앗고 우리의 경제를 장악하여 우리들을 노예상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말도 쓰지 못하게 하고 같이 모여 토론할 수 있는 정치적 자유를 빼앗았을 뿐 아니라 교육을 철저히 통제한 뒤 우리 민족을 일본사람으로 만들어 그들의 심부름꾼으로 이용하려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권을 되찾으려고 노력하거나 항일 운동을 하는 자는 가차없이 체포, 구금하고 고문을 가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혹독한 수탈과 갖은 압박속에서도 우리 민족의 반일감정과 일제에 대한 저항은 3.1독립운동으로 나타났다.


1919년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한 학생의 독립선언서 낭독으로 시작된 우렁찬 만세소리는 서울의 경우 몇일동안 일제가 전혀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만세소리는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전국 218개 군 가운데 211개 군에서 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가 잘 아는 유관순열사는 만세운동으로 학교(이화학당)가 문을 닫자 고향(충남 천원군)으로 내려갔다. 그 곳에서 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가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반 죽음이 된 채 재판에 회부되었다. 유관순 열사는 재판에서


“ 나는 조선사람이다. 너희들이 우리 땅에 와서 죄없는 우리 동포를 수없이 죽였으니 죄인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다. 그런 너희가 어찌 재판을 하겠단 말이냐? 당치도 않은 수작은 집어치워라.”


하고 떳떳이 주장하다가 7년의 징역형을 박게 되었다. 감옥 속에 갇혀서도 계속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인 간수의 모진 고문을 받았고 결국 유관순 열사는 굶주림과 병으로 그만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때가 1920년 꽂다운 17세의 나이였다. 지금 여러분과 비교하면 중3 정도의 나이에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이처럼 일제는 어린 학생에게 뿐만 아니라, 평화적으로 진행되는 만세운동을 총칼로 진압하여 수 만명을 죽이고, 10여 만 명의 부상자를 내었으며 재판을 받은 사람도 만 명이 넘을 정도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노래의 가사처럼 3월 하늘을 우러러 보며 유관순 열사 및 그 때 만세를 부르다 숨져간 수많은 “님”들을 생각해보며, 조국이 나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으며 그 때 그 분들의 장하신 행동과 죽음은 나와 우리 현실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지금까지 나의 삶은 어떠하였으며 왜 내가 학교에 다니고 있는지, 나는 왜 공부를 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보자.


새 학년에 삼일운동의 정기를 되새기며 나와 우리 민족이 복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데 진정한 일꾼이 되도록, 우리의 마음을 닦고 지식을 쌓아가는 한 해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이전글 2009학년도 학업성적평가 계획
다음글 증평중학교 배움터지킴이 선발 공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