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효정 비문(원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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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현도초 | 등록일 | 16.06.29 | 조회수 | 360 |
현도초등학교 교가에 나오는 삼효정 소개 보성오씨삼효각(寶城吳氏三孝閣)은 충청북도 청원군 현도면 달계리(達溪里) 현도초등학교에 있는 효자각으로 오상건(吳尙健), 오진택(吳振澤), 오정기(吳鼎基)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1765년(헌종 5)에 효자로 급복(給復, 조선시대에 충신.효자 등에게 요역과 전세 이외의 잡부금을 면제하여 주던 일)된 오상건(吳尙健)과 1851년(철종2)에 명정된 그의 아들 오진택(吳振澤), 그리고 손자 오정기(吳鼎基)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이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1950년에 중건하고 1978년에 보수한 것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사면을 홍살로 막고 안에는 3인의 효자문 편액을 걸었다. 밖에는 ‘삼효정(三孝旌)’이라 쓴 현판이 달려 있으며, 효자각 아래에 1971년 한글학자 눈메 한갑수가 찬서(撰書)하여 세운 보성오문삼효각비(寶城吳門三孝閣碑)가 있다. 보성오문삼효비(寶成吳門三孝碑)
하늘은 상고(上古)에 요순(堯舜)같은 성군을 보내시어 백성의 몽매(蒙昧)함을 깨우쳐 주셨고 공맹(孔孟)같은 성현(聖賢)을 보내시어 사회의 윤기(倫紀)를 세워주셨으나 인류는 고성(古聖)의 가르치심을 져버리고 도덕은 땅에 떨어졌으며 인심(人心)은 각박하여졌다. 이때 하늘은 불세출의 효문을 이땅에 내리시어 메마른 인심(人心)에 우로(雨露)를 주시니 조야(朝野)가 감루(感淚)를 머금게 한 보성오문(寶城吳門의) 수분당(守分堂) 공(公) 수한당(睡閒堂)공(公)영모재(永慕齋) 공(公 )세분의 애절한 효렴행장(孝廉行狀)이 그것이다. 수분당 공의 휘(諱)는 상건(尙健이)니 보성군(寶城君) 휘(諱)현필(賢弼) 16세 손이시요 예조판서(禮曹判書) 휘(諱) 점(漸)의 구세손(九世孫이)이 되신다. 서기 1590년 선조때에 나시고 1657년에 서거(逝去)하시니 향년(享年) 68세이시다. 평생 충효봉선(忠孝奉先)을 패현(佩弦)으로 하시며 친환(親患)이 계시어 해수(咳嗽)로 고생하시니 죽통(竹筩)으로 담(痰)을 빨아냈으며 소변(小便)이 불통(不通)함에 요도(尿道)를 빨아 통(通)하게 하시고 내게 하시고 대변(大便)을 맛보아 증세(症勢)를 살피고 기력을 잃으시매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바침으로 원기(元氣)를 회생(回生)케 하셨다. 친상(親喪)을 당하니 묘소(墓所)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생시(生時)와 다름없이 조석상식(朝夕上食)을 바치셨다. 죽(粥)을 마시고 흙에 처(處하)며 애통(哀痛)함이 정도(程度)에 지나쳤으며 삼년이 지난 후에도 조석(朝夕)으로 가묘(家廟)에 참배(參拜)하여 종신토록 계속(継續)하셨다. 수한당(睡閒堂)공(公의) 휘(諱는 진택(振澤)이니 수분당공(守分堂公) 아드님이시다 1615년에 나시어 77세 향수(享壽)로 1691년에 서거(逝去)하셨다. 생모(生母) 파평윤씨(坡坪尹氏가) 조세(早世)하시고 계모(繼母) 순천박씨(順天朴氏)가 들어오시매 이를 받드는 범절(凡節)이 극진(極盡)하여 생모와 다름이 없었다. 친기(親忌)를 맞아서 홍수(洪水)로 장길이 막힘에 제수(祭需) 장만을 못하고 애통(哀痛)할제 산새가 날아오고 개가 꿩을 물고 와서 바쳤다. 또 치재(致齋)하는 동안 개가 새끼를 낳으려 함에 부정(不淨)할 것을 염려(念慮)하니 홀연(忽然 개가 종적(蹤迹)을 감추었다가 제향(祭享) 다음날에 새끼를 물고 들어왔다. 친상(親喪)을 당하여 여막(廬幕)에 사시다가 사실(私室)에 돌아오지 않고 거기서 종신(終身)하셨다. 영모재공(永慕齋公)의 호는 정기(鼎基니) 1660년에 나시고 1734년에 서거(逝去)하셨으며 수한당공(睡閒堂公)의 손자(孫子)님이 되신다. 조모(祖母)께서 병상(病床)에서 물고기 회(膾)가 생각난다하시니 삼동(三冬)에 얼음이 덮여 구(求)할길이 없거늘 강가에서 울제 월척(越尺) 리어(鯉魚가 물구멍으로 뛰어올라왔다. 이십세때 아버님께서 마비증세(痲痺症勢)로 신음(呻吟) 하실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바침으로 수일(數日) 동안 기식(氣息)을 연장(延長)케 하였다. 마침내 상(喪을) 당하니 묘소(墓所) 옆에 여막(廬幕)에 살며 눈비에 무덤 가까이 물기가 머물지 않게 하셨다. 영모재(永慕齋)께서는 어버이를 추념(追念)하며 종신(終身)토록 사실(私室) 돌아오지 않으셨다. 삼세의 효렴(孝廉)이 임금께 달(達하)여 각각 정려(旌閭)와 복호(復戶)의 은전(恩典)을 내리셨으며 수분당(守分堂)공께는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수한당공(睡閒堂公)과 영모재공(永慕齋公)께는 교관(敎官)을 추증(追贈)하셨다. 여기 삼세(三世)의 효행(孝行)을 몇줄의 비명(碑銘)에 담아 전(傳하)는 뜻은 이 땅의 후진들로 하여금 땅에 떨어진 윤기(倫紀)를 끌어올리고 휘휘(徽徽)한 삼세의 효렴(孝廉)을 본받아서 예절(禮節)밝은 나라에 국민으로 기름진 마음밭을 가지게 하는데에 귀감(龜鑑)을 삼으려 함에 있다.
1971년 신해(辛亥) 9월 일 건립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수분당공(守分堂公) 14代宗孫 석근(奭根) 찬서(撰書) 청주 후인(淸州後人) 눈메 한갑수(韓甲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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