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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호 청렴 편지> 유배에서 돌아온 노인
작성자 황간중 등록일 16.09.29 조회수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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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충북교육청렴 편지 제82>

 

유배에서 돌아온 노인


1551(명종6) 6, 소달구지 하나가 삐걱삐걱거리면서 경북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에 도착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달구지에 탄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이곳 출신 송희규宋希奎(1494~1558)였다. 워낙 얼굴이 수척하고 늙어 보여 마을 사람들은 처음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잠시 후 노인이 달구지에서 비틀거리면서 내린 뒤 가족들이 오열하자 그제야 그를 알아보고 탄식했다.

송희규는 이 마을 사람들이 자랑하는 큰 인물이었다. 아버지 부사직 송방현과 어머니 회산 황씨의 6남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가족은 물론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어린 나이에도 좌랑 출신에게 배우면서 아침에 가면 저녁에야 돌아올 정도로 성실했다. (중략)

그는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1513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19년 문과에 오른 뒤 승승장구 한다. 그러나 1546년 소윤의 영수이자 중종 제2계비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의 탄핵을 받아 전라도 고산에 유배된다. 5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온 송희규는 유배의 후유증으로 몸을 가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쓰러지면 결국 윤원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에 고향에 도착하자마자 거처할 집을 짓기 시작했다.

송희규는 집을 지으면서 목수들에게 두 가지 원칙을 반드시 지킬 것을 주문했다. 첫째 쇠못을 사용하지 말 것, 둘째 나무에 대패질을 하지 말 것이었다. 목수들은 주인의 별난 주문에 당황했지만, 어쩔 수 없이 못 대신 구멍을 뚫어 싸리나무로 엮었고, 나무는 자귀로만 깎아서 만들었다.

이듬해 건물이 완성되었다. 송희규는 후손들까지도 이곳에서 살 수 있길 바라는 뜻에서 건물의 이름을 백세각百世閣(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63)이라 지었다.


회화나무 세 그루의 의미


송희규는 백세각에서 7년을 보냈다. 그는 백세각 대문 안 담장 주변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었는데 지금 백세 각 안 담장 옆에 살고 있는 세 그루의 회화나무는 송희규가 심은 회화나무의 후손이다. 그가 집안에 회화나무를 세 그루나 심은 것은 후손이 크게 번성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회화나무는 중국 주나라 봉건시대에 선비의 무덤에 심던 나무로 회화나무를 학자수學者樹라 부른다. 그가 회화나무를 심은 것도 이러한 유래를 본받은 것이다. 주나라에서는 앞에 회화나무를 심은 조정朝廷을 괴정槐政이라 불렀는데 조선에서도 승문원承文院 앞에 회화나무를 심고 괴원槐院이라 불렀다. 콩과의 갈잎큰나무인 회화나무가 음력 7월경 연한 황색으로 꽃을 피우면 중국에서는 진사進仕시험을 치렀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도 과거시험을 응시하러 가거나 합격했을 경우 집에 회화나무를 심곤 했다. (중략)


송희규가 실천한 가정의 화목


송희규는 자신의 집 안에 회화나무를 심은 가장 큰 목적은 집안을 가지런하게 하는 제가齊家에 있었다. 제가의 성공 여부는 가정의 화목이었다. 그래서 부모는 제가를 위해 늘 화목을 강조한다. (중략)

송희규는 가족들과 서열을 가리지 않고 화목했으며, 심지어 종들에게조차 가난한자가 있으면 도와주었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좋은 물건이 하나도 없었는데 이러한 행동에 마을사람들이 탄복할 정도였다. 송희규의 이러한 태도가 제가에 얼마나 중요한지는 형제간의 우애가 주로 부모의 재산을 둘러싸고 파탄 나는 세태를 감안하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후손으로 이어진 선비정신


송희규의 선비정신은 후손의 독립정신으로 이어졌다. 후손 송준필宋俊弼(1869~1943)19193·1운동 당시 문인들과 독립청원서 3천 장을 백세각에서 찍어 성주 장날 뿌렸다. 지금 백세각에는 독립 청원서의 내용을 새긴 현판이 걸려있다. 백세각은 송희규의 정신을 이어받은 후손들에 의해 독립운동의 산실로 거듭났다. 송준필은 독립청원운동인 파리장서사건의 핵심 인물인 곽종석, 장석영 등과 함께 활동했으며 이러한 독립정신은 성주 유림들의 독립정신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2004년에 건립한 백세각항일의적비가 있는데, 이 비는 송준필을 비롯해 송씨 문중에서 배출한 11인의 애국지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처럼 백세각은 이름에 어울리게 선비의 정신이 후손들에게 이어지고 있을 뿐 아니라 건물도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다. <중략>

새처럼 큰 뜻을 품고 실천했던 송희규와 그의 자손들, 그들은 이제 가고 없지 그 정신만은 백세각과 함께 만고에 남을 것이다.

 


· 출처: 선비가 사랑한 나무, 한겨레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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