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상업정보고등학교 로고이미지

닮고 싶은 선배님

RSS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카카오톡 공유하기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네이버밴드 공유하기 프린트하기

닮고 싶은 선배님

  • 개인정보(주민등록번호, 여권번호 등)를 등록할 수 없으며, 해당 글이 차단 될 수 있습니다.
  • 저작권을 침해하는 글을 등록할 수 없습니다.
  • 온라인 강의자료(파일, 영상 등)를 타 웹사이트 공유 또는 편집, 복제를 금지합니다.
  • NO IMAGE
    충북인터넷고 | 08.12.24 조회:395
    본교 5회 졸업생 최우식선배님 50회 사법고시 합격수기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멀지 않았음을.. - 사랑하는 후배들에게 1. 꿈의 여정 나는 원래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즈음에 난 내가 축구를 좋아하고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축구부가 있는 대성중학교에 배정이 되었다. 나는 이것이 하늘이 나에게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1학년 여름에 축구부에 자원하여 드디어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하고 싶었던 것이기에 난 훈련 후에도 따로 개인연습을 하고, 그 날 훈련한 것을 공책에 적어가며 전술을 익혔으며, 나름 전술을 만들어보기도 하였다. 그 당시 이운재(현 국가대표골키퍼)와 같이 동고동락하며 국가대표에 대한 꿈을 키워갔다. 그러나 운동부의 현실은 나에게 감당하기 어려웠다. 경제적으로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점, 공부를 거의 못한다는 점, 그리고 군대같이 엄한 선후배사이.....결국 난 3학년 여름방학에 축구를 그만두게 되었다. 내 첫 번째 꿈은 여기서 접어야 했다. 축구를 그만두게 되어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런데 어려운 가정 형편에 난 진학보다는 취업을 택했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3살에 돌아가셨다. 난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다. 그저 어머니 혼자서 5남매를 무진 고생하며 키워 왔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 뿐이었다. 난 일찍 철이 들 수밖에 없었다.) 3개월 남은 기간에 난 암기과목만 죽어라 했다. 다행히 머리는 남아 있었던지 충북상업고등학교(지금은 충북인터넷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열심히 공부하여 1등으로 졸업을 하였고, 은행에도 취업하게 되었다. 은행은 좋은 직장이었지만 난 항상 뭔가 타는 목마름을 느껴왔다. 무엇일까? 더 배우고 싶었다. 그 무렵 우리 현대사의 굴곡을 새롭게 알게 되면서 난 새로운 시야가 열림을 느꼈다. 그래 이 세상에는 내가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더 많은 것이 있어. 그것을 찾아 가자 그렇게 결심했다. 배움에 있어서 최고가 되고 싶었다. 군대 제대 후 2년간 철강공장에서 일을 해서 자금을 마련한 후 대입학원에 등록하여 공부를 하였다. 그 해 한양대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등록금이 300만원이었기 때문에 난 학교를 포기해야만 했다. 다시 재수를 하여 서울대를 가기로 하였다. 정말 열심히 하였다. 모의고사도 서울대 가능점수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 시험에서는 좋은 점수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내 두 번째 꿈은 여기서 접고 난 국립대인 충남대 법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무렵 우리 집은 전세로 살고 있었는데 임대차관련법을 잘 몰라 주인집이 경매로 넘어가게 되었다. 우리는 후순위라 경매에서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고 그런 일로 어머니와 법무사, 법원 등을 돌아다니며 이 사회를 살아가려면 법을 알아야겠다고 절실하게 느꼈다. 그리하여 대학 2학년말에 사법시험에 도전하기로 하였다. 형편상 돈을 벌면서 학교를 다녀야 했다. 수업료는 학자금대출로 하였고, 필요한 용돈 책값 밥값 등은 알바를 하면서 버티어 갔다. 그리하여 3년 만에 1차를 합격하였다. 그런데 2차 시험을 위해서는 서울에 올라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또 돈이 필요했다. 돈이 없어 올라가진 못하고 그냥 학교에서 2차를 공부하였다. 역시 그 해에는 2차 시험에 낙방하였다. 다시 심기일전하여 다음해에 1차 시험에 붙었다. 그러나 여전히 돈이 없어 막판에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서 서울에 올라가서 하였으나, 다시 낙방하였다. 그 아픔도 잠시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시게 되었다. 2차 시험 떨어지고, 내 삶의 지주였던 어머니도 돌아가시니, 난 내 인생 최악의 바닥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사람이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묘한 자신감이 생겨났다. 그래 한번 해보자 난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어 난 이제 올라갈 일만 남은거야.........다시 공부에 정진하였다. 드디어 2차 시험을 정말 힘들게 치루고 합격자 발표 보름 전에 어머님이 꿈이 나타나셨고 합격임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꿈대로 난 합격할 수 있었다.그리하여 마침내 세 번째 꿈은 이루어졌다. 2. 동전의 앞면과 뒷면 나는 지금까지 이 사회의 마이너리티로 살아왔다. 한 부모 가정, 가난, 전문계고, 지방대....... 나 스스로에 의한 것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것도 있다. 외견적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공고했다. 때로는 그것을 숨기며 부정하기도 하였지만, 결국은 스스로 그것에 대해 정면으로 부딪쳐 깨는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들보다 한 두 시간 공부도 더, 한두 번 생각도 더, 한두 번 배려도 더하려고 내 자신을 단련시켰다. 고시공부 할 때 서울대, 연고대 등 소위 명문대 사람들과 같이 공부도 하고 그랬는데, 실력 면에서 차이는 없었다. 즉, 형식적인 학벌에 의한 차이는 없었다. 단지 그 개인 능력의 차이만 있을 뿐. 사법고시는 서울대 출신이 300여명이 붙지만, 반면에 서울대 출신 1천여 명이 떨어지는 시험이다. 그리고 난 그 1천명 선발하는 시험에 300등으로 합격했다. 돌이켜보면 나의 과거가 내 발목을 잡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바꾸어 생각해 보니 그것은 내 삶의 채찍이었고, 내 마음의 비타민이었다. 세상은 바라보기 나름이다. 동전은 앞면과 뒷면이 있다. 앞면만 보면 앞면이고, 뒷면만 보면 뒷면만 보인다. 보통 사람들은 한 면만 보고 그것이 다 인줄 안다. 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길 바란다. 그리고 지나간 과거를 받아들이고, 그 위에서 어떤 미래를 지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기 바란다. 3. 내안의 길을 따라가라 2002월드컵을 회상해보면 누구나 대한민국이 4강까지 가리라곤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과연 우리나라 최고의 시험인 사법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지, 특히 내 형편에 과연 그러할 지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서도 2학년 때까지 많은 고민과 방황을 하였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라고 했던가......막상 해보니 그리 어려운 시험이 아니란 걸 알았다. 아니 내 안에 있는 내 잠재력이 얼마나 무궁무진한지,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일체유심조라 했다. 모든 것은 자기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아니면 주위환경에 대해 탓을 하면서 주저앉아 있을 것이다. 눈을 안으로 돌려 자기 내면을 바라보기 바란다. 내안에 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가라............. - 충북인터넷고 5회 졸업생 최우식
전체건수:1건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