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귀에 박히도록 들어 온말 "좋은 친구를 사귀라."
성인이 된 지금 곰곰이 생각하니 부모의 바람대로 좋은 친구를 많이 사귀지 못한 것 같고, 좋은 친구가 아니어도 좋으니 언뜻 생각나는 친구를 손으로 꼽으라 하면 막상 열 손가락도 다 꼽지 못할 정도로 선뜻 내세울 친구가 없음에 부끄러워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좋은 친구를 사귀는 데에만 신경 썼지 내 자신 친구에게 좋은 친구가 되는 데에 소홀했기 때문이 아닐까?
탈무드에 '친구를 고를 때는 한 계단 올라서라'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우리의 부모들은 좋은 친구를 사귀라는 말과 의미하는 바는 일맥상통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리 쉽게 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교제의 범위를 스스로 줄이는 한계가 있다. 나보다 못한 친구는 사귀지 말라는 말인가. 또한 나보다 좋은 친구를 사귀어야만 한다는 압박감에 우정은 이해 타산적으로 흐르기 쉽다.
논리적으로도 그렇다. 내가 먼저 한 계단 더 오르지 못한다면 자기보다 한 계단 위에 있는 친구를 사귀려는 친구는 나를 친구로 삼지 않고 다른 사람을 친구로 삼기 때문에 자연히 친구 사귀기는 어려워진다. 그래서 공자는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덕이 있으면 반드시 따르는 사람이 있다)이라 했고 랍비 힐렐은 그대 스스로 뛰어난 인물이 되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덕(德)이 있는 자는 무엇을 말함인가. 새를 부르지 않아도 새는 찾아와 둥지를 틀고, 나그네를 부르지 않아도 나그네는 찾아와 쉴 것이다. 우거진 나무라면. 덕이 있는 자는 이 나무와 같은 것이다.
그러면 어떤 친구가 좋은 친군가. 능력이, 재산이 많은 친구가 좋은 친구며 뛰어난 친군가. 그러면 자연히 친구가 모여들 것인가. 이렇게 사귄다면 역시 이해타산적인 교제라 할 것이다. 이런 교제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나의 능력이, 나의 재산이 사라지면 친구들은 자연히 내 주위를 떠날 것이다.
내가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 주는 것. 녹음을 드리워 그늘을 만드는 것. 내가 친구와 같이 길을 갈 수는 없으나 친구가 나를 찾아온다면 언제나 그늘을 드리워 휴식을 취하게 해 새 힘을 얻고 다시 길을 떠나게 해줄 것. 이렇게 된다면 좋은 친구가 내 곁에 모여들어나 역시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닌지.
-중부매일·충북도교육청 공동기획 (기본이 바로 선 충북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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