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安重根/1879∼1910)의사는 독립운동가로서 황해도 해주 출생이다. 한학(漢學)을 수학했으나 오히려 무술에 더 열중하였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카톨릭교에 입교하여 신식 학문에 접하고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 홀로 평양에 나와 석탄상(石炭商)을 경영하고 이듬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점을 팔아 1906년 그 돈으로 삼흥(三興)학교를 세우고, 이어 남포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 인재 양성에 힘썼다.
국운(國運)이 극도로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수 없다고 판단,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 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 독립대장 및 아령지구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變)과 함께 100여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실패, 노에프스키(烟秋)에서 망명투사들이 발간하는 <대동공보>의 탐방원(探訪員)으로 활약하는 한편 동료들에게 충군애국(忠君愛國) 사상을 고취하는 데 진력하였다.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 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 그 해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사살하기로 결심하고, 동지 우덕순(禹德淳)과 상의하여 승낙을 얻고 동지 조도선(曺道先)과 통역 유동하(柳東河)와 함께 이강(李岡)의 후원을 받아 행동에 나섰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軍禮)를 받는 이토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 만철이사(滿鐵理事) 다나카 세이타로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곧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뤼순(旅順)의 일본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듬해 2월,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3월 26일 형이 집행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나 많은 유필(遺筆)이 있으며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다.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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