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두나무> 과일을 좋아하는 것은 옛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야생과일로는 머루와 다래가 있었고, 재배과일로는 복숭아, 자두, 배, 살구, 감에 이어 앵두가 있었다. 제철에나 먹을 수 있을 뿐 지금처럼 보관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겨울이면 생과일을 먹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봄이 되면 만날 수 있는 첫 햇과일이 바로 앵두였다.
앵두는 지름이 1센티미터 정도 되는 동그란 열매다. 속에는 딱딱한 씨앗 하나를 품고 있으며, 겉은 익을수록 반질반질 윤이 나는 매끄러운 빨간 껍질로 둘러싸여 있다. 모양새부터 먹음직스럽다. 달큼 새큼한 맛은 입안을 개운하게 해준다. 아쉬움이라면 씨앗이 너무 커서 실제로 먹을 수 있는 과육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옛사람들에게는 간식거리를 만들 수 있는 귀중한 과일이었다.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각주 에 보면 앵두편(䭏)을 만드는 방법이 나오는데, “앵두를 끓는 물에 반쯤 익혀서 씨를 발라내고 잠깐 데친 후, 체로 거른 다음 꿀에 졸여 섞고 엉기면 베어 쓴다”라고 했다. 지금이야 맛있는 과일이 너무 많아 앵두는 쳐다보지도 않지만, 과일이 귀하던 시절의 앵두는 벌써 고려 때부터 임금의 혼백을 모신 종묘의 제사상에 먼저 올리는 과일이었다.
《동문선(東文選)》각주 에는 최치원이 앵두를 보내준 임금에게 올리는 감사의 글이 실려 있다. “온갖 과일 가운데서 홀로 먼저 성숙됨을 자랑하며, 신선의 이슬을 머금고 있어서 진실로 봉황이 먹을 만하거니와 임금의 은덕을 입었음에 어찌 꾀꼬리에게 먹게 하오리까······.”
앵두는 이렇게 임금이 신하에게 선물하는 품격 높은 과일이었다. 앵두는 꾀꼬리가 먹으며 생김새가 복숭아와 비슷하다고 하여 ‘앵도(鶯桃)’라고 하다가 ‘앵도(櫻桃)’가 되었다. 하지만 옛 문헌에 앵(櫻)은 벚나무로 읽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국조보감(國朝寶鑑)》각주 에 보면 문종(1450~1452)은 항상 후원에다가 앵두나무를 심고 손수 가꾸어 잘 익으면 따다가 세종에게 올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에 세종은 맛을 보고나서 “밖에서 따 올리는 앵두 맛이 어찌 세자가 직접 심은 것만 하겠는가”라고 했다 한다. 달리 생각해보면 앵두까지 손수 따다 올려야 하는 세자 시절의 문종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을까 싶다. 《해동농서》에는 앵두를 ‘함도(含桃)’라고 하였으며, 가장 굵고 단단한 것을 ‘애밀(厓密)’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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