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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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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호 청렴편지(청렴인물 정인보)
작성자 원평초 등록일 16.11.01 조회수 5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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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1950)

양명학 연구의 대가인 선생은 한학자로서도 유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식을 바로잡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 역사학자로도 명성을 떨쳤다. 1893년 서울에서 태어난 선생은 1950년 사망당시까지 나라의 독립과 애국을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92, 건국훈장을 추서받기도 하였다.

<정인보와 최남선>

1905년 강제 을사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벼슬에 대한 뜻을 버리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당시 절친한 사이였던 최남선이 변절하여 친일행위를 일삼자 내 절친한 친구 육당은 죽었다.”라 말하며 상복을 차려입고 그의 집에 찾아가 통곡을 했다고 한다. 이를 본 최남선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며 애국으로 돌아섰으나, 결국 다시 변절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자신을 찾아온 최남선을 향해 문도 열어주지 않으며 모질게 대하였다고 한다.(하지만 훗날 최남선을 변호를 맡아주며 남은 우정을 지키려했다고 한다.)

<뼈대와 지조있는 가문>

선생의 집안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이름 있는 가문이었다. 명문가답게 선생의 집안에는 큰 수확을 거둘 수 있는 전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10년 일제치하로 들어서면서부터 나라의 독립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느라 훗날에는 단칸의 집 한 채도 없이 빈곤한 삶을 사는 선비가 되었다고 한다.

<청렴결백의 표본>

국권을 회복하게 되면서 선생은 좋은 기회로 국학 대학 학장으로 국어와 역사를 가르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위에 걸맞은 모든 혜택을 뿌리치고, 승용차 대신 전철로 출근하며 타의 모범이 되는 수수한 생활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혼을 판 학자에게는 냉수 한 그릇도 아까운 법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청백한 학자로서의 모범을 보였다.

[출처]: 역사속 청렴이야기(정인보 편) / 레드휘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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